문재인이 취임 직후 아베한테 전화 걸어서 위안부 합의를 ‘국민정서상’ 수용 못한다고 한 것을 두고, 역시나 “아! 할 말은 하는 대통령”이라며 찬양 물결이 넘실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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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권 시작부터 국제 관계 고립의 신호탄을 쏘는 건 줄도 모르고 좋다고 하는 꼴들 보자니 안타까움에 속이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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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치에서는 반세기 이전의 과거사 문제를 꺼내는 순간 사람취급을 안 한다. 한 번 일단락이 된 걸 또 꺼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고노 담화는 취급조차 안한다. 박근혜 정부도 위안부 문제를 물고 늘어져서 3년 이상 한·일 관계 냉각기를 겪었다. 우리만 현실성이 없지 국제 사회에서는 일방적으로 비난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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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가 위안부 합의를 해준 것은 대승적 차원의 결정이었다. 위안부 합의 발표문에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워딩까지 담았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조치였다. 그리고선 한·일 간의 위안부 문제는 이것으로 최종 종결짓는다고 국가 간 합의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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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종 합의를 발표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국가 간의 합의를 국민 정서상 수용 못한다고 개차반을 놓고 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나. 일본의 입장은 물론이거니와, 과장 안보태고 국제 사회가 코웃음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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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합의에 대한 국민 반감을 조성한 주체가 어디인가? 민주당과 정대협 이하 좌익 단체들이다. 위안부 합의가 도출된 당일 국민 여론은 “세상에 드디어!” 혹은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아베가 웬일?”정도였다. 위안부 할머니들도 사과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었다. 할머니들은 다른 건 바랄 것 없고 사과만 받으면 족하다던 분들이었으니까. 나도 취재 가봐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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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민주당에서 곧바로 졸속 합의라느니, 푼돈에 나랄 팔았다느니 영락없는 친일 프레임을 가져나와서 언론에 뿌리더니, 정대협이 몇몇 정치하는 할머니들 동원하고 생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물론 ‘친일’이라면 눈깔 뒤집어지는 냄비 국민성 어디 가겠나. 국민 여론은 하루 만에 태세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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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국제 정치에서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한 건지도 모르고, 다들 물개박수 치고 앉아있는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국민 반감의 근원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그저 일본만 들이받으면 좋아가지고 난리법석인걸 보면, 과연 쇄국정책으로 국제 고립을 자처하면서도 망할 때까지 고집만 부리던 조선의 후예들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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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만 나오면 개거품 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맨날 그놈의 진정성 운운하는데, 대체 진정성 있는 사과는 무엇인가? 아베가 광화문 광장에 창자 꺼내고 할복자살하는 것 말고, 대체 어떻게 해야 받아줄 건가? 아니, 받아줄 생각이 있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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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짜 평소에 위안부에 대해 관심은 있나? 진짜 안타깝게 생각은 하나? 생존자 할머니들 이름 나열해보라고 하면 한 명이라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나? 솔직히 다들 환상 속에 존재하는 동정심 아닌가? 무슨 ‘귀향’ 같은 졸작 영화 나왔을 때나 근본 없는 의협심 부리면서 그거 안 보러가는 사람 또라이 취급이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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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몇 분이나 남아계시는 줄 아나? 쓸데없이 소녀상 앞에 누워가지고 먹고 자고 하면서 우상숭배하고 있을 때, 거기있는 애들 중에 그 무렵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빈소 간 애들 한 명도 없더라. 그때 조문 화환이랍시고는 단 하나 있었는데,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이 보낸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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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환상 속에 살지 말고, 국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 좀 뜨고 살자. 일본 여행 잘들 가면서 쓸데없는 반일 감정도 좀 버리자. 양심적으로 평소에 존재하지도 않는 공감도 없는 동정심 내려놓고, 본인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이나 잘 챙겨드려라. 그놈의 노란리본도 좀 떼버리고. 당신들 웃는 사이에 지금 나라 개박살나는 중이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780222515461036&id=100004198834698



박근혜를 탄핵까지 이르게 한 결정적인 의혹은 바로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을 만들어 겉으로는 공익재단인 것처럼 가장하나 실제로는 대통령 개인의 사적 소유물처럼 활용해 사익을 얻으려했다는 것이고 그런 것임을 알면서 기업들이 재원을 출연해 바쳤기 때문에 뇌물수수 범죄라는 것이었다.


녹취록 내용 : http://m.pub.chosun.com/mobile/news/view.asp?cate=C01&mcate=M1003&nNewsNumb=20170223404&nidx=23405


위 녹취록은 이런 혐의 구성의 논리를 전면적을 무너트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1. 특검의 전제가 맞다고 가정하면 저 재단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인사를 결정할 수 있고 이때 인사는 대통령이 원하는 사익을 챙겨줄수 있는 자기 사람으로 꽂았을 것. 그런데 K스포츠 재단의 기존 이사장과 사무총장은 대통령의 측근인 최순실이 고영태와 운영하는 더블루K에서 요청한 연구용역을 다 반려했다.(녹취록이 아닌 최순실 변호인이 법정에서 주장한 내용) 부실한 연구계획서로 도합 7억이 넘는 사익을 편취하려는 시도가 무산된 것. 즉 K스포츠 재단은 대통령 혹은 최순실이 사익을 추구하는데 협조를 하는 시스템이 전혀 아니었다는게 된다.



2. 고영태는 이에 "이사장과 사무총장이 존나 쓰레기"라며 쳐낼 궁리를 하고 여기에 최순실과의 인맥을 활용하려는 아이디어를 제시 했다.

그런데 이 모의를 하는데 "500억의 출연금"을 "우리"가 장악한다는 표현을 썼다.

이제 핵심은 그 "우리"라는 표현에 대통령이나 최순실이 포함되냐의 여부가 된다.


위 기사를 보면 시종일관 우리가 장악한다, 우리 사람, (미르쪽 사람들이) 형 사람이 되냐, (미르에)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다, 등 '우리'의 중심에는 고영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미르쪽엔 누가 있는가.


이성한 사무총장이 있는데 이성한은 차은택이 꽂은 인물로 특검 쪽 논리에 따르면 그 시점까지는 최순실 쪽 사람인 것이다. 

즉 고영태의 발언에서 나온 '우리'는 대통령은 커녕 최순실조차도 포함 되지 않는 고영태 일당만을 말하는 것.

그러니까 고영태는 자기를 중심으로한 한체대 인맥(고영태 노승일 박헌영)을 활용해 K스포츠재단을 장악해 사익을 추구하려했던 '주체'였던 것이다.




3. 근데 잘 생각해보면... 만일 두 재단이 박대통령의 사익추구를 위한 박근혜 수족들에 장악된 사적 시스템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면 고영태 일당들이 이런 발상을 할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저 녹취록은 결국 미르재단, k스포츠 재단이 대통령의 이해와 완전히 무관함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4. 여기서 소름끼치는 사실 하나.

해당 녹취록은 최순실 변호인이 개인적으로 얻은게 아니다. 

바로 검찰이 압수수색으로 입수하여 녹취록까지 떠놓은 증거물 중 하나이다.

그러니까 검찰과 특검은 이미 이 녹취록을 다 보고도 두 재단이 박근혜 최순실 사익을 위한 것이라는 '언론플레이'를 해왔던 것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다. 공동정범, 10초 횃불, 차고 넘치는 뇌물수수 증거 같은 언플의 뒤엔 그것을 반박하는 이런 핵심적인 증거들이 숨어있었다는 것.



그런데 박근혜 탄핵이 기각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 엄청난 녹취록 공개에 대해 MBC를 제외한 모든 공중파가 입을 닫고 있고 네이버나 다음 등 주요 포털에 기사한줄 보이지 않고 있다.





세줄요약

1. 고영태는 최순실과 별개로 한체대 인맥 동원해 K스포츠 재단을 장악해 사익을 추구하려 모의함

2. 고영태가 이런 시도를 하는데는 두 재단이 박대통령의 사적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님이 전제됨

3. 이런 핵심증거는 검찰과 특검이 꽁꽁숨겨왔음


장례식장에 신발이 많으면 고인의 인품이 어느정도 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장례식장에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고인에게 복(福)이요 유가족에겐 슬픔을 딛고 일어서라는 위로이자 고인을 위해서라도 더 행복하게 잘살으라는 격려인 것이다.


세월호사고...


더 많은 짐을 싣기 위한 불법개조와 부족한 평형수, 어리숙한 항해사의 운전 그리고 선장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인해 수학여행을 떠난 불쌍한 아이들이 죽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다.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때 온 국민들이 슬픔에 잠겼고 미처 피어보지도 못한 꽃을 어루만져주었다. 많은 기업들과 국민들이 유가족들을 위해 성금을 내놓았다.


딱 여기까지...

유가족들은 국민 모두가 아이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할 때 가슴에 묻었어야 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욕은 목구멍에서 삼켜야 하고 주먹은 상대방의 코 앞에서 멈춰야만 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의사표현하는 것,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국민이라면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그동안 유가족들과 그 틈에 끼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특정 단체들이 보여주었던 몰상식한 행동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세월호 사고에 대해 오만정을 다 떨어지게 했다. 대통령을 대신해 재난 현장을 찾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국무총리의 따귀를 때리고, 목숨걸고 구조작전을 펼치는 잠수사들에게는 내 아이만 구출해. 넌 죽어도 괜찮다는 식의 발언, 현장을 수습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러 왔다가 허기를 달래려 사발면을 먹는 장관에게 사발면 처먹으로 왔냐고 욕을 한다. 원래는 박준영 전남도지사가 먼저 장관에게 사발면으로라도 요기하자고 권유해서 함께 먹은 것인데, 사진을 찍은 기자는 전남도지사의 라면 먹는 부분은 오려내고 서남수 장관만 사진과 함께 황제라면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더 웃긴 것은 위 일을 계기로 서남수 장관이 사과를 하고 사퇴를 했다는 점이다.

정치병걸린 기자의 악랄한 조작 사진 한장에 국민들이 동요하고 장관이 사퇴하는 나라.

이게 대한민국의 수준이다.


요즘 기자들이 왜 기레기 소리를 듣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던 그 시간에 문재인과 박영선은 고급 식당에서 만찬을 즐겼다. 부랴부랴 현장에 와서 수습하다가 먹은 라면은 황제라면이고 세월호가 침몰해가는 그 시각에 문재인과 박영선이 즐긴 만찬은 우리편이니 착한 만찬인가? 거기다가 온갖 떼쓰기, 음모론에 불법 폭력시위까지... 그리고 사고 당사자도 아닌 3학년 학생들에게는 정신적인 충격에 대한 보상이랍시고 대학입학 특례 혜택을 주어서 많은 수험생들의 공분을 샀다.



그런데 정작 침몰하는 와중에 아이들에게 방에서 꼼짝말고 있으라 하고 가장먼저 탈출한 선장을 욕하는 유가족은 아무도 없다.

세월호를 탈출한 후 배에서 노름으로 딴 5만원권을 빨래줄에 널어 말리던 선장은 때려 죽여도 시원찮은데 유가족들은 선장은 아무 잘못이 없고 무조건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말한다. 내가 유가족이었으면 감옥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선장 찾아가서 죽도록 두들겨 팼을텐데...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유가족들의 이러한 몰상식한 행동들 덕에 대다수 국민들은 세월호에 등을 돌렸다.

3년간 질질 끌고 있는 세월호가 얼마나 지긋지긋 했으면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성향이 강하다는 단원구 구민들이 새누리당 후보를 당선시킬까?


지금 대부분의 국민들은 세월호에 대해 지긋지긋 하다고 한다.

아이들은 불쌍하지만, 이젠 그만해야할 때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6천만 국민의 진심어린 추모는 아이들이 가지고 가야할 복(福)이었다.

그 복마저 뻥 차버린 유가족들때문에 불쌍하게 죽어간 아이들의 영혼마저 비참해지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슬픔은 헤아리고도 남음이다.


유가족분들은 이제 그만 아이들을 보내주시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잘 사시는 것이 하늘에 있는 아이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한 찌라시 언론이 선박을 잠수함이라고 선동하여 많은 개돼지들이 신나게 퍼날랐던 사진.



요즘 자로라는 사람이 2년간 세월호를 조사하여 진실을 밝힌다는 다큐가 장안에 화제다.

설마 또 초중딩들이나 믿을법한 잠수함 충돌설은 아니겠지... 하고 봤더니 역시나 잠수함 충돌설이다.

그걸 또 믿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팩트고 나발이고 그냥 닥치고 믿고 싶었던 것일수도?


사람들 의식 수준이 구한말에서 단 한발자국도 못나갔다.

차라리 국민 개돼지설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처음엔 박근혜가 국정원을 사주하여 일부러 침몰시켰다고 했다가 씨알도 안먹히자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고 했다가 미국 잠수함과 충돌하여 침몰했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근거 없는 날조로 밝혀져서 잠수함 충돌설을 주장하는 멍청이들이 사라지나 싶었더니만, 잠수함 충돌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그걸 또 언론들이 신나서 보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니 참 우울하다.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이 왜 불가능한 것인지 알아보자.



맹골수도는 잠수함이 들어갈 수 없는 수심

잠수함이 잠수할 수 있는 수심 마지노선은 50m다. 이는 잠수함 폭 10m, 함교탑에서 잠망경까지 15m, 수상선박 홀수 15m, 해저와의 간격 10m를 고려한 것이다. 맹골수도는 수심 35m~37m로 잠수함이 억지로 들어갈 수는 있으나 여러가지 문제로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는 지역이므로 애초에 잠수함 충돌설은 개돼지들한테나 먹힐 음모론이다. 십수년 전에 해군 209급 잠수함이 서해 45m 수심에서 뻘에 쳐박힌 적이 있다. 그 지역에 일부러 접근했던 것은 아니고 훈련중 실수로 연안에 접근하려다 벌어진 사고다. 소형 디젤 잠수함인 209급도 수심 80m 이하에서는 작전을 하지 않는다. 특히나 우리나라 서해는 어선들이 버린 폐그물과 양식장 쓰레기가 스크류에 감기는 경우가 많아서 더더욱 연안으로 접근하질 않는다. 

그런데 뭐? 맹골수도에 핵잠수함?




맹골수도의 조류는 잠수함이 접근할 수 없음

맹골수도는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수상함은 스크류가 앞에 있고 키가 뒤에 있어 타효가 좋고 속력이 빨라 기동성이 뚸어나지만 잠수함은 키에 부딪히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 반대로 설치되어 있어 타효가 좋지 않아 기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수중에서 저속으로 움직이는 잠수함은 조류의 영향을 크게 받아 매우 위험하다. 따라서 잠수함은 기본적으로 조류가 빠른 곳은 들어가지 않는다. 참고로 잠수함의 기동성이 얼마나 떨어지냐면 2차대전 당시 특수 전함이 잠수함을 만나면 잠수함의 진행 방향에 기뢰라는 것을 퐁당퐁당 떨어트렸는데, 기동성이 떨어지다보니 알고도 회피하지 못하고 당하던게 잠수함이다. 물론 발견되기 전의 잠수함은 엄청난 공포를 선사하는 무기지만 말이다.




세월호와 잠수함의 충돌시  잠수함의 피해가 더 큼

세월호와 잠수함이 충돌하면 잠수함이 더 큰 손상을 입는다. 우리 잠수함은 1,200톤이나 세월호는 6,800톤으로 충돌했다면 잠수함이 침몰했거나 즉시 부상하여 조선소에서 수리를 했어야 하나 수리한 적이 없다. 잠수함에서의 누수는 곧 침몰을 의미하기 때문에 수리창이나 조선소에 가서 수리를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걸 아무도 모르게 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


그리고 잠수함과 충돌하여 6,800톤급의 배가 침몰했다면 엄청난 충격으로 크게 찌그러져야 하는데 그런 흔적도 없이 천천히 기울어지다가 뒤집힌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자로라는 사람은 세월호의 1/6 크기 즉, 24m정도 되는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세월호와 충돌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세월호 크기의 1/6정도 되는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세월호의 길이는 145m인데 1/6은 24m. 하지만 우리나라가 보유한 잠수함의 길이는 56m, 65m이다. 세월호의 1/6크기 잠수함이라면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연어급 잠수함(29m)이다. 그러면 세월호와 충돌한 잠수함은 북한 잠수함인가?


잠수함 충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미국이나 한국의 잠수함이지 북한의 잠수함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친북'성향을 탑재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이해는 간다만....



천안함은 북한의 공격으로 인한 폭침인데 좌초라 하고 세월호는 좌초인데 외부 공격으로 인해 침몰했다고 한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억측과 음모론을 끄집어내어 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려서 뭘 얻고 싶은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뇌를 열어보고 싶을 뿐이다.




사람은 좋아하는 무언가가 사실은 안좋은 것으로 드러나면 그것에 대한 좋아했던 마음이 돌아서게 된다.

그것의 정도에 따라 관용과 용서를 베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필자의 마음이 그랬었다.

JTBC의 특종보도인 태블릿PC로부터 촉발된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최순실이라는 측근이 국정에 개입하고 태블릿PC로 국가기밀을 유출하여 국정을 농단했다는 엄청난 사건.

JTBC의 특종보도를 보고 필자는 박근혜에게 큰 실망을 했고 TV를 볼때마다 혼자 "저런 병신같은년ㅉㅉㅉ"이라는 말을 수없이 중얼거릴정도로 큰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동안 있었던 JTBC의 수많은 조작, 왜곡보도의 전력을 떠올리며 "설마 또 조작은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엄청난 사건을 조작한다는건 있을 수 없을거야"라고 잠깐 의심을 했지만, 워낙 중대사안이기 때문에 JTBC의 특종보도를 그대로 믿었다. 본래 필자는 정치, 사회적 이슈를 받아들일 때 교차검증을 통해 그것이 확실한 사실인지 확인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 최순실 게이트는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JTBC의 언론보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최순실 사건요약 포스팅도 했던 것이다. ( http://inthink.tistory.com/30 )


그런데 요즘 JTBC보도를 보면 자꾸만 의심이 든다.

기자들의 주장도 서로 안맞고 급기야는 말도 바꾸고 있다. 사태를 이지경까지 오게만든 가장 중요한 증거인, JTBC가 입수했다는 최순실의 태블릿PC 실물을 단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최순실 변호인 측에서 그 최순실 것이라는 태블릿PC를 증거로 채택하자니깐 최순실과 상관없는거라 증거채택을 할 수 없단다. 이게 말이니 방구니? 그런데다가 그 태블릿PC가 최순실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속속 나오니 JTBC 손석희는 태블릿PC는 사실 중요한게 아니고 세월호때문에 대통령이 탄핵된거라는 개소리를 하고 있다. 아니 상식적으로 국민들이 분노했던 이유가 최순실이 자기 태블릿PC로 국가기밀을 유출했다는 보도때문인데 왜 태블릿PC를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는 뭔가가 밝혀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청문회 방송을 꼼꼼히 챙겨보고 있는데, 역시 밝혀지는건 하나도 없고 질문하는 국회의원들의 수준은 차마 눈뜨고 못볼정도의 유치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청문회가 아니라 누가 더 병신인지 경기하는 자리같았다. 정말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수준이 이정도로 허접할 줄은 몰랐고 다른 나라에서 볼까 걱정이 될 정도다. 심지어 안민석의원은 오늘의유머의 한 유저가 뇌내망상으로 디시인사이드에 올린 우병우 증인의 자식 유치원 관련 글을 아무런 사실검증도 없이 증인에게 물어보고 있는 꼴이란.... 



최초 광화문에 모였던 약 10만여명(경찰추산 6만)의 박근혜 하야집회 시위인원 속에는 필자와 같은 마음으로 참여했던 보수성향의 시민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날이갈수록 최순실게이트가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의혹만 가득하고 그 의혹들 조차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속속 밝혀져서 그런지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언론들은 100만이니 200만이니 하지만, 끽해야 10만명정도 수준이고 가장 최근의 시위에는 수만명정도가 모일정도로 시위를 해야할 명분과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추세다. 솔직히 10만명도 많이 쳐준 수치다.


보수논객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가 최순실 태블릿PC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하여 최순실 태블릿PC가 JTBC 손석희의 조작보도임을 밝혀내고 방통위에 징계요청을 했다고 한다. 발언에 있어 굉장히 신중하고 확실한 팩트검증을 하기로 유명한 변희재 대표가 "OOO는 OOO다" 라고 단정했을 땐 그만한 자신감이 있어서라 생각된다.


변희재 대표는 최근 손석희의 조작보도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헤친 과정들을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있는데 가장 최근의 영상을 올려본다.

검색을 통해 본 포스팅을 보는 여러분들도 한번 보시고 판단을 해보시길...








육영수 여사가 살해된 후 사이비 교주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접근하여 자신에게 육영수 여사의 영혼이 빙의되었다면서 성대모사를 하는 등 어머니를 잃어 슬픔에 잠긴 박근혜를 포섭하였고 박근혜는 이에 넘어감.





최태민의 농간에 속아넘어간 박근혜는 자신이 가진 전권의 상당부분을 사이비교주인 최태민에게 위임, 최태민은 정치, 사회, 언론, 경제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중앙정보부(중정)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박정희대통령은 분노하여 1977년 9월에 최태민을 직접 심문하기에 이르렀고 최태민이 박근혜를 이용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우려함.





박정희의 공보비서관 선우련 씨의 비망록







그러나 최태민은 박정희대통령과 중정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근혜의 곁에 있었다.






이에 중앙정보부 및 다른 기관들이 '이런 사기꾼이 영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처리해야한다.' 라고 박정희에게 건의할때마다 박근혜는 최태민을 지켜주었다.






이후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 혼령과의 영접능력과 예지력을 물려받았다' 면서 자신의 딸 '최순실'을 박근혜에게 소개시켜준다.






이들의 만행을 보다못한 박근령과 박지만은 1990년 8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다.



"순수한 저희 언니에게 교묘히 접근해 언니를 격리시키고 고립시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축재 행위가 폭로될까봐 계속해 저희 언니를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아 왔다"

"(최태민은) 경비원을 언니에게 붙여 우리 형제들과 완전히 차단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 형제들은 서로가 지척에 있으면서도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도 들을 수 없으며, 전화 대화마저도 못하는 실정"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에 깊숙이 관여해 회계장부를 교묘한 수단으로 조작하여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

"지금은 서울 강남 및 전국에 걸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편지도 무용지물.

최태민과 최순실은 박근혜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어머니 사랑이 지극했던 박근혜에게 있어 최태민과 최순실은 단순한 측근 그 이상이었다.






이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모든 국가기밀과 정책이 사이비 종교인의 손에 휘둘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정책, 안보, 경제, 외교, 조직개편 등 국가의 모든 것이 사이비 종교인의 손아귀에 놀아난 사건이며 아직도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상태.

청탁이나 뇌물 등이 통하지 않고 대통령 당선 후 어떻게 한자리 안될까 하고 바라보던 선거에 도움을 주었던 인물들과 딱 선을 긋는 등 올곧은 이미지로 높은 지지를 받았던 박근혜가 알고보니 사이비 종교인에게 휘둘리는 역대급 멍청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육영수여사가 죽은 직후에는 어린데다가 부모 잃은 슬픔에 그랬다 치지만, 나이를 먹고도 최 부자를 떼어내지 못하고 국정에 관여시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이 되질 않는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하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진보진영보다 보수진영이 더 분노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닭근혜...

좌파진영에서 별명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아버지 1/10도 못따라가는 박근혜는 탄핵당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하야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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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최순실게이트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최근 포스팅한 http://inthink.tistory.com/31 글도 읽어 보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소아성애자 새끼였던 김성주(북한의 김일성)


김일성 본명은 김성주가 맞다.


한겨레와 일부 전교조들이 이 사실을 오도하고 있고, 이게 마치 학계에서 격파당한 이론이라는 둥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김일성 본명은 김성주라는 사실을 정설로 보고있고 이에 대한 논란은 이미 끝난 상태다. 


그런데 왜 저런 헛소리들이 나오냐?


우리가 알고 있는 김일성은 당시에 새파란 청년이었고 이름이 김성주였다. 

그리고 '김일성'이라는 독립운동가도 동시대에 존재했었다.


그런데 이 김성주가 항일 운동을 하면서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김성주가 항일 운동을 한 것은 맞는 얘기다)

그치만 이 김성주가 항일 운동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낸건 보천보전투밖에 없다.


이것 때문에 일찌감치 김성주(지금의 김일성)를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하고 있던 소련은 부족하다고 판단하였고 김성주는 다른 김일성이 했던 항일운동의 성과도 뺏어오기 위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어쨌든 다른 김일성이 이뤄놓은 업적을 자기 업적에 플러스 알파해서 북조선을 차지한 것은 명확한 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극좌언론들과 좌파진영은 북한 김일성이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고 지랄을 하느냐?


바로 군부 독재시절에 김일성의 (김성주던, 진짜 김일성의 것이던) 항일운동의 가치를 폄훼하기 위해서 일부러 평가 절하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극좌언론들과 좌파들은 이미 팩트 확인된 것들도 다 군사독재시절의 논리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즉, '김일성도 분명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했다!' 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좌파들이 잘하는 흔한 진실 왜곡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들은 486 시대때 북한이 우리나라를 쳐들어 온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북한을 도발했다는 수정주의적 견해와 함께 지금까지 성장해왔다. 실제로는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소련쪽 기밀 문서들이 다 밝혀 지면서 수정주의적 견해들이 몰락했고, 슈킨 보고서 및 스탈린의 극비 문서를 통해 이미 북쪽 지도자를 만드는 작업을 소련에서 깊게 관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들이 오도되고 있는 점에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고, 이러한 사실들은 북한에 관심있다면 쉽게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1939년 3월 31일 만주일보에 공개된 박정희의 혈서.




왜곡 날조된 박정희 대통령의 혈서가지고 진짜로 믿는 병신들이 많아서 팩트검증 해본다.


진보진영에서 혈서 이야기 할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문경 심상소학교 재직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씨의 증언이 나온다.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던 박정희에게 유증선이 충고하길 나이도 한 살 정도 줄이고 편지와 함게 혈서를 쓰도록 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즉석에서 면도칼로 새끼 손가락을 그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바쳤고 만주신문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라고 나오는데 왜 좌파들이 걸핏하면 이 이야기를 꺼내냐면 조갑제가 보수성향의 인물이다보니 자신들의 주장이 더 힘을 받을거라는 계산에서다.


뭐가 틀렸는지 알아보자.



1. 만주군 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이 20세.

2. 나이를 한 살 줄였다.

3. 만주일보가 진짜로 보도했는가?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서가 존재했는가?





쇼와 14년에 작성된 『陸軍預科士官學校生徒、陸軍經理學校予科生徒及陸軍幼年學校生徒召募告示の件』이라는 일제의 공문서다.

 

응시자격 연령 16~20세 미만.

 

유증선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그당시 박정희는 22살이었는데, 한 두 살 낮춘다고 합격할수 있는게 아니라는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증선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시절 교련과목 이수자였다.

즉 그시절 교련과목 이수로 하사관 자격이 있었다.

 

하사관 자격이 있는 자는 위의 제한연령 규정에도 불구하고 26세까지 지원할 수 있었는데, 유증선이 처음부터 저 말을 했다는게 거짓이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나이때문에 만주군을 못들어간다고 고민했다는거부터 개소리. 즉 유증선이 증언하는 그 전재부터 잘못됐다는 말이다.






이게 그 증거자료이며 출처는 역시 앞의 자료와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45년 일제가 작성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를 보면 박정희는 날짜를 고치지 않고 군생활을 한게 나온다.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6년 9월 30일로 되어 있다.

1917년 9월 30일로 되어 있고, 이는 실제 박정희의 생일과 같다.

즉 나이문제로 혈서를 쓰고 고민을 했다는 유증선의 소리가 개소리라는게 나온다.



자 그럼 혈서에 대해서 계속 밝혀보자.

혈서는 1939년 만주일보에 나와있다고 증언했다.





일본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만주일보는 1935년 폐간됐는데, 1939년에 박정희의 혈서를 어떻게 보도하나?

그리고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저 신문에 나와있는 징모과 라는 부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쯤되서 아 거짓이었구나... 하겠지만, 나꼼수 극좌 언론, 극좌논객들의 사설을 보고 단단히 세뇌되어 피보다 진한 신념을 가지게 된 얼간이들을 위해 더 밝혀보도록 하자.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는 신문은 박정희가 1939년 3월 29일에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가 합격한 군관학교는 1939년 2월 24일 합격자 발표를 이미 하였다. 따라서 군관학교에 합격하기 위해서 혈서를 쓰고 채용담당자를 감격시켰다는 기사는 구라로 판명.


좌파들은 합격하고 나서도 합격하게 해달라고 편지를 쓰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혈서의 진본이 남아있다. 라고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데...




이게 좌파들과 쪽바리들이 주장하는 그 신문의 내용이다.

혈서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고 그에 관한 기록도 없으며 다만 위 만주신문의 기사내용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저 신문은 증거로 인증받지 못했다. 


왜냐고?

 

1. 신문 원본이 없음. (즉 신문원본은 없고 저 마이크로필름만 하나 떡히 있다는거다. 원본 요청에 일본측에서 거부)

2. 심지어 저 사진에 있는 신문조차 복사본이다. ( 즉 사본을 저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은것. 사본은 조작이 용이해 증거 효력 X)

3. 저 신문의 다른면은 공개하지 않음. ( 즉 박정희의 혈서가 있는 저 부분만 공개함. 다른부분에 대해서는 박물관  측에서 함구)

4. 저기에 쓰은 글은 1939년 당시 쓰지않는 현대 일본어로 적혀져 있다. (즉 현대에 와서 적은거라는말)

5. 애시당초 날짜가 맞지 않다.

6. 저 자료에 대해 한국측에서 조사를 위해 일본에 공식적으로 요청했지만 박물관측에서 거부.




결론


유증선의 증언과 위 마이크로필름 신문기사 한토막 모두 사실이 아니므로 박정희 혈서는 거짓이다.

저것으로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논리라면 국민들에게 일본 쪽바리 전범(일왕)을 천왕이라 부를 것을 천명하고 일왕 죽었을 때 가장먼저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문했으며, 독도를 우리의 수역 안으로 넣어서 그었던 이승만의 독도라인을 일본과 독도를 함께 공유하게끔 라인을 새로 정한 김대중은 부관참시해야할 친일파가 된다.



과거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확장경쟁에 열을 올릴 무렵, 프랑스가 식민지화한 나라중 하나가 바로 베트남이고 대략 100여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 쌀국수의 기원이 프랑스인들이 뜯어먹고 난 돼지 뼈다귀를 가져가 국물을 우려 만들어 먹은게 기원이다.


어쨌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됨으로 1차생산물인 쌀, 고무, 커피, 후추 등의 농작물을 거대 플렌테이션을 통해 수탈을 당하게 됐고, 그 결과 지금도 베트남은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많은 커피원두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어있다. 흔히 알고있듯 남베트남 북베트남으로 갈려 이념에 의한 전쟁을 치룬 베트남이라는 나라는 사실 원래 남-북이 투닥거리던 나라였다.


18세기 중엽 북쪽은 여씨가, 남쪽은 완씨가 세력을 키워 서로 투닥거리다가 프랑스의 원조를 약속받고 완씨가 베트남을 통일하게 되는데 프랑스는 약속과는 달리 별로 한것도 없이 쥐꼬리만한 원조를 빌미로 이것 저것 조약을 맺다가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켜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북베트남인들은 '남쪽 병신들이 외세에 굴복해서 나라를 잃었다'라고 생각하며 이를 갈게 된다.

이것이 훗날 베트남 전쟁의 비엣민(월맹)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근데 1942년에 일본이 대동아공영을 주장하며 연합국 세력을 동남아에서 몰아내게 되는 일이 일어났고,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라 일본군에게 밀려서 베트남 및 인도차이나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에는 새로이 일본군 주둔하게되는데, 일본은 프랑스인들 전부를 쫓아내지는 않고 프랑스 총독부는 그대로 내비두었다.


왜냐하면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긴 했지만 점령지 사정에 밝은것도 아니고 원주민들과 친화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일본말만 잘 듣는다면 그대로 내비두고 베트남에서 자원을 빨아내는게 둘사이에 win-win 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본진이 독일한테 털리면서 베트남까지 컨트롤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베트남의 현지사정에 밝은 프랑스 관리들을 포섭해서 1944년까지 대략 3년간 프랑스 총독부를 부려먹게 된다.




하지만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왕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되자 일본은 베트남에서 철군하였고 베트남 역시 한국처럼 독립을 맞고 독립국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일본군이 주둔했지만 일본은 프랑스인들의 권리행사를 묵인한 상태였고 어찌보면 프랑스 총독부 자체는 베트남에서 그대로 식민지에 대한 권리행사를 계속 해왔던 것. 어쨌든 그런 이유로 프랑스는 일본패망 후 예전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다시 군대를 파병해서 진주하게 된다.


그런데 웬걸?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군들은 상당수 무기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버렸고 더이상 식민지는 안된다며 궐기한 지방의 명문 호족 군벌 세력들이 일본군이 두고간 무기로 이미 무장을 해버렸다. 무장한 지방군벌의 저항에 부딫힌 프랑스는 베트남의 무장해제를 위해 영국과 중국에게 베트남에 군대를 주둔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북위 17도 기준으로 북쪽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17도 이남은 영국의 로열아미가 각각 군대를 주둔을 시키게 되는데,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본토에서 모택동의 인민해방군한테 털리고 있는 와중이라 베트남 정세까지 개입할 여력이 안되었기에 그냥 명목뿐인 군대주둔이었다.





바로 이때 호치민이 나서서 북부지방 호족의 군벌세력을 통합하며 북베트남 정세를 수습하고 공산주의 노선을 표방하게 된다.

즉, 스탈린과 모택동 편에 붙은 것이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엣민, 즉 월맹(Viet Minh/ 越盟)이다.


이렇게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 남베트남으로 갈라지게 된다.

영국도 군대를 주둔시키긴 했는데 버마(현 미얀마)하고 인도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영국은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빼버린다.


어쨌든 북쪽은 이미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거의 장악을 한 상태였고, 프랑스는 이제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장고끝에 악수라고 커져가는 월맹의 압박에 고민하던 프랑스는 월맹의 거점도시였던 항구도시 하이퐁에 포격을 가하고 군대를 투입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2차대전의 전화를 피부로 느껴보지 못했던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패닉에 빠지게 되었고 당장은 체계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월맹군은 하노이를 버리고 산악지대로 숨어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우리나라 1.4후퇴 흥남부두처럼 피난민들이 와글와글 몰려있다.

이게 1949년도 일인데 여기 이후부터는 우리나라도 피곤한 시기라서 별로 관심들이 없을지도...

실제로 미-소-중 간에 가장 큰 관심과 경제/군사력을 집중한 곳은 한반도, 즉 우리나라였으니 말이다.


 

이때부터 벌어진 전쟁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른다.

쭈르륵 건너뛰고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게 된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도 이름을 남긴 전투인데, 디엔비엔푸라는 곳은 대부분이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베트남에서 공중을 이용한 물자조달을 가능하게 하는 프랑스군의 핵심시설이었다. (활주로가 있었다는 말)


철의 요새라고 불리는 디엔비엔푸, 이곳이 없으면 프랑스군은 베트남 내에서 작전자체가 성립이 안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반드시 이 곳을 함락해야만 하는 월맹군. 

프랑스군의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군대조직에 맞서 북베트남이 선택한 전술은 철저한 게릴라 전술이었고 히트 앤드 런으로 대응하는 북베트남 게릴라들에게 프랑스군의 피로도는 말도못하게 심했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 지휘관 나바르는 정글속 게릴라들을 일일이 때려잡다간 세월 다 보내게 생겼고 이 게릴라들을 싸그리 끌어내서 화끈하게 소탕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최고 중요시설이면서도 고립지형인 디엔비엔푸에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월맹이 반드시 디엔비엔푸를 공격해서 탈취해야 하니까 자기네 모든 병력과 물자를 한곳에 몰아넣고 공격해 들어오는 월맹군을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림으로 보면 이렇게 방어만 하면서 몰려드는 월맹군을 조진다는 개념이다.

프랑스 지휘관 나바르 장군은 당연히 이길거라는 생각에 빠져있어서 그 이외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를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프랑스군 최정예 부대 15,000명이 요새에 배치되고 월맹 게릴라들과의 일전을 준비를 한다.


 

근데 한가지 간과한게 날씨의 중요성.

베트남은 위아래로 긴 형태의 나라고 디엔비엔푸 지역은 열대 몬순기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10월에서 이듬해 3월은 날씨가 좋은데 4월부터 9월까지 1,5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는 기후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바르는 벙커로 입구를 틀어막고 수송기로 탄약 및 식량, 의약품 등을 투하하면 되겠지~하고 보급에 대해 낙관적이었지만 현실은 보급을 할 수가 없었다. 악천후야 그렇다치고 어찌어찌 디옌비옌푸까지 날아가더라도 디옌비옌푸를 둘러싼 월맹군의 대공포때문에 화물투하도 제대로 안되고 투하거리까지의 접근이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싣고왔으니 투하하면 그중에 몇개는 진지에 떨어지겠지 하고 대충 뿌렸는데 대부분 월맹군이 줏어갔다.

1954년 3월, 월맹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이게 웬걸? 막상 뚜껑열어보니 월맹군이 의외로 강했던 것이다.

그냥 그 전처럼 원주민이 소총정도로 무장한 줄 알았는데 정규군급 무장과 전술로 개전 수시간만에 프랑스군 진지 하나를 초토화 시켜버리자, 프랑스군은 당황하여 전투기를 출동시켰는데 정글속에서 뿜어대는 월맹군 대공포에 작살이 나버린다.


이는 어디선가 군사적 지원을 받은게 분명하다는 이야기.


※ 나중에 기밀해제되면서 미국의 CIA가 1946년까지 월맹을 지원했다는게 밝혀짐.

 


더 웃긴건 프랑스가 월맹군을 얼마나 빙다리 핫바지로 봤는지 월맹군 포격을 아예 고려도 안했다는 것이다.

월맹군은 반대편 고지에 포를 끌고와서 프랑스 진지를 포격으로 두들겼고 프랑스가 대응포격을 해보려고 했지만 디엔비엔푸가 상대적으로 저지형이라 포격이 불가능했다. 위에서는 계속 월맹군 포대좀 어케해보라고 다그쳤지만 방법은 없고... 결국 멘붕한 포병대장은 권총자살하고 만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4월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폭우시즌이 시작됐다.

이 말이 뭐냐면 그나마 뜨문뜨문 오던 보급마저도 아예 끊어지게 된 것이다.

암만 세계최강의 군대라도 보급이 없으면 싸울 수 없는 법...


배고프고 목도 마르고... 폭우가 쏟아진다지만 정작 마실물이 없다는게 함정이었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같이 시작된  장티푸스, 이질로 인해 물은 사방에 널려 있었지만, 음용수가 없었던 것.

거기에 우기가 시작되면서 창궐한 모기떼들 때문에 발병하기 시작한 말라리아는 덤이었다.




마침내 5월 7일 8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스군은 견디다 못해 결국 항복 하고 만다.


다음날인 1954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회의 내용은 프랑스는 약한 베트남에게 얻어 터졌으므로 베트남을 점령할 자격이 박탈되게 된다는 평화합의성명이었다.

대부분 나라들은 베트남 독립에 동의했지만 2차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새로운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미국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읭?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이 어째서 베트남의 독립을 반대했지?

내 블로그에 와서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박박 우기던 좌빨 꼰대아재의 논리가 바로 위 사실을 근거로 한다.


여기에는 미국이 반대입장을 낼 수밖에 없는 몇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1950~1953까지 막대한 군병력과 물자, 비용을 퍼부은 한국전쟁이 명분에서나 실질에서나 별로 소득도 없이 끝났다.

(당시 분위기는 그랬고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한국은 100년동안 깡통차고 다닐거라는 생각이 당연시 되었으니까 말이다.)



둘째

에치슨 라인을 확보하여 태평양호수(Pacific Lake)를 만들어 제해권을 확보하려면 베트남이 공산화가 되면 절대로 안됐다.

여기서 잠시... 에치슨 라인이 뭐냐면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1950년 1월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모택동 두 돼지의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설정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이었다.





미국의 지역방위선은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라인 즉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거였는데 여기엔 한국하고 대만, 인도차이나반도가 미국의 방위에서 없었다. 그리고 바로 5개월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딘 애치슨은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재설정된 에치슨라인이 소위 말하는 독도를 기점으로 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이승만 라인이었는데, 훗날 김대중대통령에 의해 일본에게 유리하게 변경되었다.



아마 베트남이 공산화 안됐더라면 필리핀의 수빅 미군기지는 없었을거고 미군의 동북아시아 물류허브를 베트남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아시아 판도는 많이 달랐을거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는거지만 그때 당시에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어쩌면 대한민국이 베트남, 라오스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셋째

이게 중요한건데 사실은 프랑스와 베트콩의 전쟁은 대리전이었다.

미국이 직접 개입하기 좀 뭐하니까 예전에 연고가 있던 프랑스를 불러서 전쟁비용의 90%와 무기, 탄약을 줘가면서 싸우라고 독려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프랑스가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보급이 바닥나서 항복을 하니 미국으로선 열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열받은 미국은 독립국가 인정을 하지 않았고 북베트남보고 꼬우면 나랑 한판 뜨자고 하여 회담장 분위기가 급냉각된다.



넷째

미국이 베트콩의 성분을 잘못 파악했다는 데에 있다.

사실 1946년 까지는 미국이 물자도 나눠주고 유럽국가들의 식민지팽창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지원해준건데 호치민이 알고보니 공산주위자 였던 것.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에 사로잡혀서 살짝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공산주의의 "공"자만 나와도 분노하던 미국 국민들은 15년간 알고지낸 옆집 스미스 아저씨도 신고때리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이사람이 존.R.매카시



위스콘신주의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이사람이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내가 그 명단을 갖고 있다." 이런 말을 날려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근데 당시에 메카시한테 "야 너 그말 책임질수 있음? 팩트있음?"하고 몰아부쳤는데 매카시는 "증거는 있는데 일반에 공개하면 사회적 파장이 있으니까 비공개로 입증하겠다" 라고 해서 비난을 받게 된다.


결국 매카시가 몸담던 공화당에서조차 매카시를 비난하는 결의를 내고 정치생명이 끝나지만, 2003년 기밀해제되면서 매카시 주장이 사실이었다는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때 미국이 엄청난 혼란도 겪고 억울한 사람도 많이 나왔지만 내부 청소를 깨끗하게 단행하고 앞으로 나아갈 정책기조가 만들어지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매카시즘이 지금은 안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그와 무관하게 그 당시에는 미국엔 심각할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이 들끓었고 심지어 초대 FBI 국장 에드가 후버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정도였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이다"

                      

당시 미국은 여기저기서 빨간 선동하는 길거리 선동꾼들도 실제로 많았고 Communist Party USA라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실제 빨갱이 정당이 활개치던 시기였다. (60여년 전의 낡은 사상을 한국에선 지금까지 추종하는 세력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뿐) 암튼 이 이야기는 일단 베트남 전쟁의 배경을 이야기하자면 뺄수가 없는 부분이다. 정확히는 Progressive Party(진보당)이지만, 원래 출범할 당시는 미국 공산당이었다. 근데 세상 분위기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분위기다보니 슬쩍 이름을 모호하게 바꾼 것...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정당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해산되었다.





그리고 1947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비에트 연방하고 완전히 선을 긋는 발언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자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것이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다.

이 후,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과 방향타가 되는 정책이 되었고 수십년간 지구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됐다.

두 진영이 경쟁하면서 군사/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다시 베트남 상황으로 돌아가서...


어쨋든 링위에 올라간 놈은 프랑스였고 1954년 7월 20일 제네바에서 프랑스하고 호찌민 정부하고 협상을 한다.

그리고 그 협상에서 "2년뒤인 1956년 6월까지 남 북 총선거해서 단일 베트남 정부 수립하고 우리는 그거보고 철수할께"하는 합의를 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병신짓... 이것이 바로 김일성부터 시작해 김정일, 김정은, 한국에서는 현 문재인대통령이 추진하려 하는 연방제통일과 같다.


미국은 이제 프랑스가 싸놓은 똥을 치워야 할 상황이 됐다.


잘 보면 프랑스 vs 베트남의 전쟁은 제국주의 vs 민족주의 양상이었는데, 2년뒤 베트남 총선거가 열린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당연히 호치민의 압승으로 끝나는거였고 이건 볼 것고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남한과 북한이 연방제통일 총선거를 했을 때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북한은 100% 투표율이 나올 것이고, 친북성향의 대가리 빈 개돼지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100%가 나올리 만무하다.

그래서 연방제통일을 하면 북한주도의 공산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대한민국 개돼지들은 우리이니가 하는건 무조건 옳다고 박수를 쳐주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


이야기가 딴데로 샜다.


암튼...

그렇게 되면 베트남은 당연히 공산화가 되는거고 그런 결과가 되면 도미노 효과로 인해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의 팽창은 불보듯 뻔한 것.



그래서 미국은 아직 덜 빨간 남베트남에 친미 반공정부를 수립해서 적화를 막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트남은 그때까지 유명무실한 황제가 있긴 있었는데, 바로 응오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였다. 사실 예전에 망했어야 하지만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위해 얼굴마담으로 세워둔 인물. 베트남인들에게 식민지배라면 이가 갈리는데 식민시대 로봇황제로 새정부 세우면 반감만 커지는건 당연한 일.


그냥 새정부를 안세우고말지...





그래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이라는 철저한 반공주의자 인물이 낙점이 된다.


그리고1955년 10월 26일 공산주의와 타협은 없다! 남북선거 무효를 외치며 남쪽의 단독선거로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베트남의 분단체제가 확립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런 남북분단으로 오히려 곤란한 상황에 빠진건 호치민이었다.

오랜 전쟁은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북베트남은 아직 정치체제나 사회질서도 확립되지 않았고 도와준다던 스탈린 모택동 두 돼지들은 연락도 안되었다. 오히려 미국+남베트남 연합의 병력들이 밀어붙이면 언제라도 백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제 남베트남에 지엠 친미정부를 세우고 베트남은 자유민주주의국가임을 선포하고 지지해준다. 디엔비엔푸 전투까지는 식민정책을 앞세운 열강의 패권주의 vs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의 양상이었지만, 이제 미국의 개입한 이 후 공산권의 지원을 받는 공산세력 vs 서구 자유주의의 지원을 받는 자유세력의 대결 양상이 된 것.


응오딘지엠 정부는 초기에는 정치를 어느정도 잘 하는 듯 보였고 지엠정부의 정치기본노선은 반공, 보수였다.

"때려잡자 호치민! 무찌르자 공산당!" 이 기본 슬로건이었단 말.

그러니 미국입장에서는 뭐 "음 잘하고있는 모양이군" 이정도로만 생각하게 된다.

 

애초에 호치민이 제안한 1956년 남북총선도 거부하고 독자적인 남베트남 정부를 수립한 것도 "공산주의자들하고는 협상같은거 없어!" 이런 강직(?)한 반공정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데 항상 모든 역사가 그렇듯 문제는 전혀 생각치 못한데서 발생한다.


그 시작은 응오딘지엠의 주변권력자들의 부패와 부정였는데,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지엠 대통령이 독재하고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건 진짜 원인은 아니다. 남베트남 사회가 미국이 생각하는 것만큼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엔 국민의식이 너무 낮았다고 얘기하는게 아마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일단 독재라고 불릴만큼 긴 시간을 통치한것도 아니고, 일단 모양새 자체는 정식 의회를 가진 합법정부 아래서 남베트남 정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응오딘지엠도 문제였지만, 응오딘지엠과 함께 가야할 지방 호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다른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동남아권 국가들은 아직도 지방호족이 득세하는게 현실이다.


일례로 2009년 민다나오의 마긴다나오주(州)에서 선거기간에 시장 후보와 기자단을 싹쓸이해서 처형한 근대사에 유래없는 일이 있었다. 그게 그동네 호족 명문가인 안달 암파투안이 대대로 해처먹고있었는데 "민주선거가 좋은것이다!" 하면서 자기 밑에 일하던 놈이 출마하려고 하니까 자기 사병(私兵)들 시켜서 기자단하고 시찰중이던 시장후보를 모조리 암살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전세계적인 여론이 크게 들끓었지만 아로요 가문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지지호족세력이라 나중에 유야무야 끝이 나버린다.


※ 필리핀은 아로요 VS 아키노 가문이 대통령을 서로 배출하는 혈통세력



각설하고....

 

독재는 호치민 패거리가 갖다붙인 말이고(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군중들은 자세한거 싫어한다. MB OUT도 그래서 나온 것) 디엠이 실정(失政)을 하게 된 이유에 디엠본인이 문제인 이유도 있지만, 이 지방호족들이 크게 관련되어 있는데, 남베트남의 호족세력들은 그전에는 누리보지 못한 경제적 풍요와 막강한 권력이 한순간에 쥐게 되었다.


누구때문에?


미국때문에...


그냥 공산주의 OUT! 만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해준거다.

어쨌든 사회의 부의 편중과 부정부패는 확산되어갔고 이로 인해 사회불만세력이 나타나게 됨과 동시에 얘네들을 살살 긁는 선동꾼들(우리나라로 치면 종북단체 및 기타 세력들)이 나타났는데, 이렇게해서 남베트남에서는 월맹의 지원을 받는 산하 단체들이 지들끼리 국가에 준하는 행정체제를 구축해버린다. 그중 가장 큰게 종교단체였는데 이는 불교와 천주교 양쪽에 큰 세력으로 자리잡아 민중들의 선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자신들이 추종하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숙청됨)




나중에 남베트남 멸망하고 사이공시를 호치민시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얘네들이 자경단 비스무리한 조직을 만들게 되고 이게 시민군으로 발전해서 정부에 폭력으로 대항하다가, 2차 전쟁 개전 후에는 베트콩에 전부 편입되어버린다. 결국 1960년 12월 20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지엠 반대세력들이 민족해방전선 (NLF : Nation Liberation Front)을 결성한다.



둘째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건 응오딘지엠의 제수씨였던 마담 누 였다.





인터넷에서 많이 본 사진이다.

틱광둑이라는 승려가 소신공양을 하는 순간인데, 이 한사람의 분신자살이 이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될지는 아마 당시엔 누구도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일단 지엠대통령은 카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지엠의 가장 최측근은  제수씨였던 마담 누였다.(위 사진)


원래 이름은 트랑 르 수안인데 지엠 대통령 동생인 응오딘누의 와이프였다.

응오딘지엠은 정부 요직의 관료를 가족들로 채웠는데, 동생 응오딘누는 내무장관, 마담누의 아빠는 미국 대사, 엄마는 유엔대표, 마담누의 삼촌들은 각료로 임명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미혼이라 마담누는 영부인의 자격으로 대통령궁에서 살게했다. 그런데, 이 응오딘디엠과 마담 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디엠이 마담 누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나게 된다.


알고보니 이 마담누의 실체는 골이 텅 빈 된장녀였던 것.

비싼돈 처들여서 파티하고 놀아제끼는건 일상이고 여성부 비스무리한걸 만들어서 이상한 법을 제정, 이혼, 간통, 피임, 음주, 춤, 무당, 노름은 다 불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마담 누도 카톨릭 신자였는데, 위에 얘기한 틱광둑 스님이 분신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마담누에서 비롯된다.



1963년...

 

호구남 지엠은 마담 누하고 뭔 얘기를 나눴는지 베트남 내의 불교사찰을 폐지한다는 이상한 법을 의회 통과시켰고 그리고 같은해 5월 석가탄신일에 불교 행사를 다 금지시켜버리게 된다.





"이제부터 절금지! 스님금지!" 


당연히 불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지금도 베트남 국민 75%가 불교신잔데, 정말 후안무치한 법이 아닐 수 없었으며 당연히 여기저기서 시위가 일어났고 지엠정부는 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을 해버리는 바람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종교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1963년 6월 11일 틱광둑이라는 승려가 목숨을 불사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어쩌면 그냥 극렬분자의 분신자살정도로 끝날 일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의 물꼬를 터준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마담 누였다. 이미 그전부터 된장녀 짓을 하도 하고 다녀서 콜린스 미국 대사가 마담누를 정치에서 좀 물러나게 하라고 지엠 대통령한테 몇번 얘기를 할 정도였다.


마담 누는 이 틱광둑 분신사건에 대해서 정말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리는데...

 

"어머 라이브로 바베큐 되는 중 또 나타나면 이번엔 나 꼭가서 구경해야지!" 라는 어이없는 메가톤급 발언을 했고






아니나다를까 틱광둑 이후로 6명의 분신자가 더 나타났고 종교탄압에 대한 시위+소요사태를 이용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분탕질로 남베트남 사회는 엉망이되어갔는데, 한국으로 치면 2008년 광우병 폭동때 종북단체들이 개입해서 선동질하며 폭력시위로 변질시킨 것과 100% 똑같다. 


놀팅 대사는 마담누좀 빨리 어떻게 좀 하라고 닥달했지만, 지엠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할 시기는 한참전에 지났다.

단순히 제수씨였다면 어떻게 정리를 했겠지만, 그렇게 못했다.

1963년 8월...드디어 이성을 잃은 지엠은 계엄을 선포하고 절에 군부대를 투입해서 1,400여명의 승려를 사찰폐지법(?) 위반으로 체포하게 된다. 그리고 절에 군대가 투입되어 승려들을 사살하고 곤봉으로 뚜들겨 패는 모습을 마담 누에게 보여주면서 마담 누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고 마담 누는 자신에게 충실한 지엠의 행동에 기뻐하였다.





이 미친년은 그날 저녁 언론 인터뷰에서 "이 때가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라고 끝없는 망언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남베트남은 이미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고 결국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나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 종교탄압에 대한 불만을 그냥 놓칠 호치민이 아니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감을 직감한 미국은 같은해 8월 지엠을 지지했던 놀팅 대사를 소환하고 헨리 캐봇 로지 대사를 급파했다.

로지는 시급히 남베트남의 상황을 파악한뒤 워싱턴에 1급기밀문서를 타전하게 되는데, 내용은 지엠정부는 이미 절망적 상태이며 대다수의 남베트남 국민들이 호치민 세력(북베트남 간첩, 좌익세력 등)에 의해 선동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1963년 11월 1일 남베트남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된다. 




응오딘지엠 대통령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 는 쿠데타를 일으킨 두옹반민 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근데 재미있는건 그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 마담누는 미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남편(?)이 사망한 걸 알고는 이탈리아로 망명해버리고 만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일부 학자들은 호치민이 미인계를 쓴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


결국 엎어진 물은 어쩔수 없어서 미국은 쿠데타 세력에 대해 실낱같은 기대를 가졌다.

쿠테타 세력이 독재권을 뒤엎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길 기대했던 것...


근데 이 쿠테타 세력들이 NLF(남베트남해방전선, 우리나라로 치면 통진당같은 종북세력)에 우호적인 것이 아닌가...


"북베트남 님들... 미국놈들 제껴버리고 우리민족끼리 대화합시다!"


결국 미국은 믿을놈 하나도 없구나 하고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즉각 본격개입을 시작해서 1962년 남베트남 군사원조 사령부 (MAC-V : 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를 설치하고 준 전시상태에 돌입한다.

직접 나서서 한판 떠야 결말이 나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 그렇게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남 북의 대립과 긴장은 높아져가다가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게된다. 



[아래부터는 엔하위키 참조]


1964.8.2. 

통킹만 공해상에서 정찰임무(코드명 DESOTO Patrols; 북베트남의 해안레이더를 가동시켜 레이더망을 파악하려던 작전)중이던 미 구축함 매덕스(Maddox)호를 향해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했으나, 매덕스호는 어뢰공격은 피하고 기관총 공격에 의한 아주 경미한 손상을 입었음


1964.8.3. 

미 국무성은 북베트남에 강력히 항의하며 더 이상 도발할 경우 중대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


1964.8.4. 

터너 조이(C. Turner Joy)호와 함께 다시 정찰임무에 나선 매독스호는 북베트남으로부터 공격의 전조로 추정되는 레이더 시그널을 받고 있었고,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소나 담당병사가 자신의 배의 프로펠러 소리를 북베트남의 어뢰공격으로 착각하여 어뢰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함. 나중에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그날 밤 북베트남의 공격이 실제론 없었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 당시 미군 당국과 함정의 승무원들은 공격이 있었다고 확신함.







즉, 미국이 전쟁을 촉발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격받았다!' 이라고 허위보고 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미 의회는 베트남 전쟁을 승인하고 1965.8.5. 미 항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호와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호에서 함재기들이 발진하여 북베트남의 어뢰정 기지를 폭격하였다.


이렇게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이고 미국의 국익을 위했던 어쨌건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지, 아무 이유없이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은 당시 매우 복잡다양했던 남베트남의 정세와 국제 이해관계도 모르면서 극좌언론의 사설들만 주워 듣고는 월남전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부득부득 우기는 극좌 꼰대아저씨 공부좀 하시라고 포스팅 함.





1954년 7월 21일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월남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권인 월맹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60년 12월 공산 월맹의 지원으로 월남 내 공산조직인 월남민족 자유전선이 설립되어 월남 정부에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본격적인 월남전이 시작되었다. 신생독립국 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미국은 1964년 이후 연간 500억 달러를 퍼부으며 53만 여명을 파견, 전사자 5만 8256명 부상자 20만명이라는 피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악화된 여론 및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발을 빼기 위해 1968년 5월 10일 파리에서 월맹과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한다.





당시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100만톤의 식량을 비롯한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대남적화 공세를 멈추지 않았던 월맹이 평화협상에 나선 목적은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 봉기를 통해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세우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측에서 평화협상을 제의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결국은 미국을내쫓기 위해서 한 거였거든요. 미국을 내쫓으면 공산화 시킬수 있다. 평화회담을 하기전에도, 할때에도 , 한 다음에도 무력남침 공산화 전략은 변함이 없었거든요. 겉으론 변한것 같아서 거기에 속았죠. 그래서 월남은 망한 거죠."

 

 

월남의 정치 상황은 이러한 월맹의 치밀함과는 대조적이었는데, 전쟁이 치열했던 1967년 9월3일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난립했다. 이 선거에서 패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 변호사는 외세 배척및 우리민족 끼리를 내세우며 동족 살상,월맹에 대한 폭격금지, 미군철수, 조속한 남북 평화회담등을 주장했고 이같은 발언은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여론을 자극했다. 마치 지금의 대한민국내 종북세력들 처럼...





 

"우리끼리 싸움을 해서 말이야 더군다나 외국군까지 불러들여서 여기가 피바다가 되었으니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안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평화 협정을 맺어서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해 나가겠다. 우리는 한민족이다. 이렇게 자꾸 주장을 하는데 공산당 당원이었던 거야. 몰랐죠."





파리에서의 비밀협상 진행이 알려진 후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5년여 협상끝에 월맹에 40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등 12개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월맹이 심리전, 월맹내 사회불안,미국내 반전 분위기등에 시달리던 미군은 월남 야당의 철군주장을 빌미로 1973년 3월 전면 철수하게 된다.


 

미군 철수의 결정적 원인은 택토 공세때문이라고 할수있다.

택토 (월남의 구정 연휴) 공세란 월맹의 기습공세로 미대사관이 점령당하는 등 위리를 맞았으나 미군의 반격으로 9만명이상의 월맹군이 사살됨





"미국이 발을 뺀 근본적인 원인은요. 미국 대사관이 점령을 당하니까 말이야 앞으로 아무리 싸워도 끝이 안나겠구나.그들이 미국을 내쫓기 위해서한거죠. 월맹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었는데도 그건 전부 외면하고 신문에서는 미 대사관이 점령당했다. 미군이 몰살당했다 하니까 정말 이쪽이 사실은 크게 이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배하고있는 것으로 인식 되어 버렸습니다. 다 이긴 전쟁이었는데.다평정하고 월맹군이 산악지역에 조금 남아있었는데 월남 통일을 못하고 미군이 나가버렸죠."



13만 군사중 9만명 이상을 잃은채 미군의 공격을 피해 산악 지역으로 피했던 월맹군.

하지만 미군은 월맹군을 완전 섬멸하지 못한채 반전 여론에 의해 철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장비도 훨씬 우월한 적을 대면해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면이든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려 했죠.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전선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철수 당시 미국은 월남과 방위 조약을 체결하면서 월맹이 평화협정을 파기하면 해군및 공군력을 동원하여 월맹에 대한 폭격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굳게 약속했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와 장갑차 400대 항공기 700대등 10억 달러 이상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함으로써 그무렵 월남의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의 남북의 경제력 차이와 미군의 철저한 유사시 지원 약속은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 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미국은 그럴 것이라 판단했다.





"(평화협정 채결 후) 티우 대통령을 만났어요. 월맹이 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죠. 월맹은 전쟁할 능력이 없다. 너무 가난해서 하루 두끼도 못먹는다. 그것도 소금 바찬으로 연명하고있다. 미국이 4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협정을 깰수 있겠는가?10년 동안은 못 나온다. 그 기간동안 석유개발등을 통해 월맹과 격차를 벌여 놓으면, 월맹은 끝내 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월남에서는 파리에서 채결된 평화협정을 완전히 믿고 있었죠. 협정을 통해 모든게 해결될것이라고.."




이같은 믿음은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이 월맹을 과소평가하고 총체적 안보불감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부, 승려, 언론인, 학생등 좌익 인사들은 이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티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또 월남 정부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만에 반정부 게릴라 단체인 베트남 임시혁명 정부청사에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까지 많은 공산 간첩이 침투해 있었다.


1967년 대선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를 비롯해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와 대통령 비서실장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경찰장관이었던 창반만, 대통령궁을 폭격한 월남 공군 대위 구엔타인충등 많은 정치인과 관료, 군인 언론인, 종교인들이 공산간첩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수있다.





그리고 이러한 월맹의 치밀한 정보수집과는 대조적으로 월남의 대공 정보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못했다.





"우리는 제복을 입은 운전사가 모는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타고 부유한 자본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드러내놓고 왕래하며 상황을 염탐했습니다. 혹시라도 계획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이었죠."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면 정보기관들이 또 바뀌고 이러다 보니 정보기관들이 완전히 무력화 되어 이북(월맹)의 정보가 많은데 하나도 알아내지 못한 거죠."





공산세력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수십개의 언론사를 통해 정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우익인사들을'무식한 전쟁광'으로 매도하는 한편 무자비하게 암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 중산층,언론인등 다수의 우익들은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결국 소수의 조직화된 좌익들의 공세에 당할수 밖에 없었다.

 

1975년 3월 10일 월맹은 파리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월남에 이미 오래전부터 침입해 있던 간첩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는 동시에 18개 사단이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즉각 전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해서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는 티우 대통령의 호소를 외면하고 짜후탄 신부와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를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분열과 총체적 부패 그리고 의욕상실에 빠져있던 월남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 겠다는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1975.3.26  월남의 제 2도시 '다낭' 함락

1975.4.21  티우 대통령 하야. 해외 도피

1975.4.30 월맹의 총공세 50여 일만에 사이공 함락

1975.4.30 자유월남 패망



군사, 경제력 및 인구등 모든 면에서 월맹을 압도했던 자유 월남은 결국 월맹의 총공세 이후 50여일만인 4월30일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이공 함락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은 물론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며 월남 패망에 앞장 섰던 짠후탄 신부 등 종교인, 교수, 학생 및 통일 운동가 까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어 졌고 대부분 처형되는 등 수백만 명이 처형, 학살되었다.


 


"베트콩으로 활동한 월남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해 제거해 버렸습니다."

리 라닝 ('베트콩과 월맹의 내막'의 저자)





이렇게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인사들까지 처형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런일이 뜻밖이라고 생각하냐구요? 강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정도의 일에 그리 놀라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지킬줄 몰랐고, 진실을 알면서 침묵하기만 했고, 외면하기만 했기에 자유의땅 사이공은 함락이후 너무나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결국,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는 월남 국민들에게 평화 협정과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 조각일 뿐인 것...

 

공산화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이어진 보트피플들의 월남 탈출.

약 106만명으로 추정되는 보트 피플중 11만명이 배가 전복되어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것으로 추정되고있다.




당시 공산 월맹이 구사한 전술

 


'통일 전선전술'

 

 

약 6000여명의 정예 공산당원들을 월남에 침투시킴

민족을 내세워 월남의 종교인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등을 배후 조종, 반정부. 반미 시위를 주도(남한의 종북세력과 똑같다)

결국 월남은 내부분열.

미군철수.

주적계념, 경계심 무너짐.

 월맹의 공격.

(월남의 전투기조종사는 자기가 지켜야할 대통령궁으로 기수를돌려 맹렬한 폭격을 가함.

↓  

월남은 이미 전의 상실.

자유월남은 1975년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짐



왠 극좌 아재가 월남전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댓글을 달길래 포스팅하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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