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성애자 새끼였던 김성주(북한의 김일성)


김일성 본명은 김성주가 맞다.


한겨레와 일부 전교조들이 이 사실을 오도하고 있고, 이게 마치 학계에서 격파당한 이론이라는 둥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김일성 본명은 김성주라는 사실을 정설로 보고있고 이에 대한 논란은 이미 끝난 상태다. 


그런데 왜 저런 헛소리들이 나오냐?


우리가 알고 있는 김일성은 당시에 새파란 청년이었고 이름이 김성주였다. 

그리고 '김일성'이라는 독립운동가도 동시대에 존재했었다.


그런데 이 김성주가 항일 운동을 하면서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김성주가 항일 운동을 한 것은 맞는 얘기다)

그치만 이 김성주가 항일 운동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낸건 보천보전투밖에 없다.


이것 때문에 일찌감치 김성주(지금의 김일성)를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하고 있던 소련은 부족하다고 판단하였고 김성주는 다른 김일성이 했던 항일운동의 성과도 뺏어오기 위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어쨌든 다른 김일성이 이뤄놓은 업적을 자기 업적에 플러스 알파해서 북조선을 차지한 것은 명확한 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극좌언론들과 좌파진영은 북한 김일성이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고 지랄을 하느냐?


바로 군부 독재시절에 김일성의 (김성주던, 진짜 김일성의 것이던) 항일운동의 가치를 폄훼하기 위해서 일부러 평가 절하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극좌언론들과 좌파들은 이미 팩트 확인된 것들도 다 군사독재시절의 논리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즉, '김일성도 분명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했다!' 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좌파들이 잘하는 흔한 진실 왜곡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들은 486 시대때 북한이 우리나라를 쳐들어 온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북한을 도발했다는 수정주의적 견해와 함께 지금까지 성장해왔다. 실제로는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소련쪽 기밀 문서들이 다 밝혀 지면서 수정주의적 견해들이 몰락했고, 슈킨 보고서 및 스탈린의 극비 문서를 통해 이미 북쪽 지도자를 만드는 작업을 소련에서 깊게 관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들이 오도되고 있는 점에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고, 이러한 사실들은 북한에 관심있다면 쉽게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1939년 3월 31일 만주일보에 공개된 박정희의 혈서.




왜곡 날조된 박정희 대통령의 혈서가지고 진짜로 믿는 병신들이 많아서 팩트검증 해본다.


진보진영에서 혈서 이야기 할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문경 심상소학교 재직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씨의 증언이 나온다.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던 박정희에게 유증선이 충고하길 나이도 한 살 정도 줄이고 편지와 함게 혈서를 쓰도록 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즉석에서 면도칼로 새끼 손가락을 그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바쳤고 만주신문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라고 나오는데 왜 좌파들이 걸핏하면 이 이야기를 꺼내냐면 조갑제가 보수성향의 인물이다보니 자신들의 주장이 더 힘을 받을거라는 계산에서다.


뭐가 틀렸는지 알아보자.



1. 만주군 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이 20세.

2. 나이를 한 살 줄였다.

3. 만주일보가 진짜로 보도했는가?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서가 존재했는가?





쇼와 14년에 작성된 『陸軍預科士官學校生徒、陸軍經理學校予科生徒及陸軍幼年學校生徒召募告示の件』이라는 일제의 공문서다.

 

응시자격 연령 16~20세 미만.

 

유증선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그당시 박정희는 22살이었는데, 한 두 살 낮춘다고 합격할수 있는게 아니라는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증선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시절 교련과목 이수자였다.

즉 그시절 교련과목 이수로 하사관 자격이 있었다.

 

하사관 자격이 있는 자는 위의 제한연령 규정에도 불구하고 26세까지 지원할 수 있었는데, 유증선이 처음부터 저 말을 했다는게 거짓이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나이때문에 만주군을 못들어간다고 고민했다는거부터 개소리. 즉 유증선이 증언하는 그 전재부터 잘못됐다는 말이다.






이게 그 증거자료이며 출처는 역시 앞의 자료와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45년 일제가 작성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를 보면 박정희는 날짜를 고치지 않고 군생활을 한게 나온다.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6년 9월 30일로 되어 있다.

1917년 9월 30일로 되어 있고, 이는 실제 박정희의 생일과 같다.

즉 나이문제로 혈서를 쓰고 고민을 했다는 유증선의 소리가 개소리라는게 나온다.



자 그럼 혈서에 대해서 계속 밝혀보자.

혈서는 1939년 만주일보에 나와있다고 증언했다.





일본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만주일보는 1935년 폐간됐는데, 1939년에 박정희의 혈서를 어떻게 보도하나?

그리고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저 신문에 나와있는 징모과 라는 부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쯤되서 아 거짓이었구나... 하겠지만, 나꼼수 극좌 언론, 극좌논객들의 사설을 보고 단단히 세뇌되어 피보다 진한 신념을 가지게 된 얼간이들을 위해 더 밝혀보도록 하자.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는 신문은 박정희가 1939년 3월 29일에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가 합격한 군관학교는 1939년 2월 24일 합격자 발표를 이미 하였다. 따라서 군관학교에 합격하기 위해서 혈서를 쓰고 채용담당자를 감격시켰다는 기사는 구라로 판명.


좌파들은 합격하고 나서도 합격하게 해달라고 편지를 쓰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혈서의 진본이 남아있다. 라고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데...




이게 좌파들과 쪽바리들이 주장하는 그 신문의 내용이다.

혈서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고 그에 관한 기록도 없으며 다만 위 만주신문의 기사내용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저 신문은 증거로 인증받지 못했다. 


왜냐고?

 

1. 신문 원본이 없음. (즉 신문원본은 없고 저 마이크로필름만 하나 떡히 있다는거다. 원본 요청에 일본측에서 거부)

2. 심지어 저 사진에 있는 신문조차 복사본이다. ( 즉 사본을 저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은것. 사본은 조작이 용이해 증거 효력 X)

3. 저 신문의 다른면은 공개하지 않음. ( 즉 박정희의 혈서가 있는 저 부분만 공개함. 다른부분에 대해서는 박물관  측에서 함구)

4. 저기에 쓰은 글은 1939년 당시 쓰지않는 현대 일본어로 적혀져 있다. (즉 현대에 와서 적은거라는말)

5. 애시당초 날짜가 맞지 않다.

6. 저 자료에 대해 한국측에서 조사를 위해 일본에 공식적으로 요청했지만 박물관측에서 거부.




결론


유증선의 증언과 위 마이크로필름 신문기사 한토막 모두 사실이 아니므로 박정희 혈서는 거짓이다.

저것으로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논리라면 국민들에게 일본 쪽바리 전범(일왕)을 천왕이라 부를 것을 천명하고 일왕 죽었을 때 가장먼저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문했으며, 독도를 우리의 수역 안으로 넣어서 그었던 이승만의 독도라인을 일본과 독도를 함께 공유하게끔 라인을 새로 정한 김대중은 부관참시해야할 친일파가 된다.



과거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확장경쟁에 열을 올릴 무렵, 프랑스가 식민지화한 나라중 하나가 바로 베트남이고 대략 100여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 쌀국수의 기원이 프랑스인들이 뜯어먹고 난 돼지 뼈다귀를 가져가 국물을 우려 만들어 먹은게 기원이다.


어쨌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됨으로 1차생산물인 쌀, 고무, 커피, 후추 등의 농작물을 거대 플렌테이션을 통해 수탈을 당하게 됐고, 그 결과 지금도 베트남은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많은 커피원두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어있다. 흔히 알고있듯 남베트남 북베트남으로 갈려 이념에 의한 전쟁을 치룬 베트남이라는 나라는 사실 원래 남-북이 투닥거리던 나라였다.


18세기 중엽 북쪽은 여씨가, 남쪽은 완씨가 세력을 키워 서로 투닥거리다가 프랑스의 원조를 약속받고 완씨가 베트남을 통일하게 되는데 프랑스는 약속과는 달리 별로 한것도 없이 쥐꼬리만한 원조를 빌미로 이것 저것 조약을 맺다가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켜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북베트남인들은 '남쪽 병신들이 외세에 굴복해서 나라를 잃었다'라고 생각하며 이를 갈게 된다.

이것이 훗날 베트남 전쟁의 비엣민(월맹)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근데 1942년에 일본이 대동아공영을 주장하며 연합국 세력을 동남아에서 몰아내게 되는 일이 일어났고,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라 일본군에게 밀려서 베트남 및 인도차이나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에는 새로이 일본군 주둔하게되는데, 일본은 프랑스인들 전부를 쫓아내지는 않고 프랑스 총독부는 그대로 내비두었다.


왜냐하면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긴 했지만 점령지 사정에 밝은것도 아니고 원주민들과 친화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일본말만 잘 듣는다면 그대로 내비두고 베트남에서 자원을 빨아내는게 둘사이에 win-win 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본진이 독일한테 털리면서 베트남까지 컨트롤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베트남의 현지사정에 밝은 프랑스 관리들을 포섭해서 1944년까지 대략 3년간 프랑스 총독부를 부려먹게 된다.




하지만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왕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되자 일본은 베트남에서 철군하였고 베트남 역시 한국처럼 독립을 맞고 독립국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일본군이 주둔했지만 일본은 프랑스인들의 권리행사를 묵인한 상태였고 어찌보면 프랑스 총독부 자체는 베트남에서 그대로 식민지에 대한 권리행사를 계속 해왔던 것. 어쨌든 그런 이유로 프랑스는 일본패망 후 예전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다시 군대를 파병해서 진주하게 된다.


그런데 웬걸?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군들은 상당수 무기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버렸고 더이상 식민지는 안된다며 궐기한 지방의 명문 호족 군벌 세력들이 일본군이 두고간 무기로 이미 무장을 해버렸다. 무장한 지방군벌의 저항에 부딫힌 프랑스는 베트남의 무장해제를 위해 영국과 중국에게 베트남에 군대를 주둔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북위 17도 기준으로 북쪽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17도 이남은 영국의 로열아미가 각각 군대를 주둔을 시키게 되는데,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본토에서 모택동의 인민해방군한테 털리고 있는 와중이라 베트남 정세까지 개입할 여력이 안되었기에 그냥 명목뿐인 군대주둔이었다.





바로 이때 호치민이 나서서 북부지방 호족의 군벌세력을 통합하며 북베트남 정세를 수습하고 공산주의 노선을 표방하게 된다.

즉, 스탈린과 모택동 편에 붙은 것이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엣민, 즉 월맹(Viet Minh/ 越盟)이다.


이렇게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 남베트남으로 갈라지게 된다.

영국도 군대를 주둔시키긴 했는데 버마(현 미얀마)하고 인도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영국은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빼버린다.


어쨌든 북쪽은 이미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거의 장악을 한 상태였고, 프랑스는 이제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장고끝에 악수라고 커져가는 월맹의 압박에 고민하던 프랑스는 월맹의 거점도시였던 항구도시 하이퐁에 포격을 가하고 군대를 투입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2차대전의 전화를 피부로 느껴보지 못했던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패닉에 빠지게 되었고 당장은 체계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월맹군은 하노이를 버리고 산악지대로 숨어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우리나라 1.4후퇴 흥남부두처럼 피난민들이 와글와글 몰려있다.

이게 1949년도 일인데 여기 이후부터는 우리나라도 피곤한 시기라서 별로 관심들이 없을지도...

실제로 미-소-중 간에 가장 큰 관심과 경제/군사력을 집중한 곳은 한반도, 즉 우리나라였으니 말이다.


 

이때부터 벌어진 전쟁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른다.

쭈르륵 건너뛰고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게 된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도 이름을 남긴 전투인데, 디엔비엔푸라는 곳은 대부분이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베트남에서 공중을 이용한 물자조달을 가능하게 하는 프랑스군의 핵심시설이었다. (활주로가 있었다는 말)


철의 요새라고 불리는 디엔비엔푸, 이곳이 없으면 프랑스군은 베트남 내에서 작전자체가 성립이 안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반드시 이 곳을 함락해야만 하는 월맹군. 

프랑스군의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군대조직에 맞서 북베트남이 선택한 전술은 철저한 게릴라 전술이었고 히트 앤드 런으로 대응하는 북베트남 게릴라들에게 프랑스군의 피로도는 말도못하게 심했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 지휘관 나바르는 정글속 게릴라들을 일일이 때려잡다간 세월 다 보내게 생겼고 이 게릴라들을 싸그리 끌어내서 화끈하게 소탕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최고 중요시설이면서도 고립지형인 디엔비엔푸에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월맹이 반드시 디엔비엔푸를 공격해서 탈취해야 하니까 자기네 모든 병력과 물자를 한곳에 몰아넣고 공격해 들어오는 월맹군을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림으로 보면 이렇게 방어만 하면서 몰려드는 월맹군을 조진다는 개념이다.

프랑스 지휘관 나바르 장군은 당연히 이길거라는 생각에 빠져있어서 그 이외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를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프랑스군 최정예 부대 15,000명이 요새에 배치되고 월맹 게릴라들과의 일전을 준비를 한다.


 

근데 한가지 간과한게 날씨의 중요성.

베트남은 위아래로 긴 형태의 나라고 디엔비엔푸 지역은 열대 몬순기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10월에서 이듬해 3월은 날씨가 좋은데 4월부터 9월까지 1,5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는 기후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바르는 벙커로 입구를 틀어막고 수송기로 탄약 및 식량, 의약품 등을 투하하면 되겠지~하고 보급에 대해 낙관적이었지만 현실은 보급을 할 수가 없었다. 악천후야 그렇다치고 어찌어찌 디옌비옌푸까지 날아가더라도 디옌비옌푸를 둘러싼 월맹군의 대공포때문에 화물투하도 제대로 안되고 투하거리까지의 접근이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싣고왔으니 투하하면 그중에 몇개는 진지에 떨어지겠지 하고 대충 뿌렸는데 대부분 월맹군이 줏어갔다.

1954년 3월, 월맹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이게 웬걸? 막상 뚜껑열어보니 월맹군이 의외로 강했던 것이다.

그냥 그 전처럼 원주민이 소총정도로 무장한 줄 알았는데 정규군급 무장과 전술로 개전 수시간만에 프랑스군 진지 하나를 초토화 시켜버리자, 프랑스군은 당황하여 전투기를 출동시켰는데 정글속에서 뿜어대는 월맹군 대공포에 작살이 나버린다.


이는 어디선가 군사적 지원을 받은게 분명하다는 이야기.


※ 나중에 기밀해제되면서 미국의 CIA가 1946년까지 월맹을 지원했다는게 밝혀짐.

 


더 웃긴건 프랑스가 월맹군을 얼마나 빙다리 핫바지로 봤는지 월맹군 포격을 아예 고려도 안했다는 것이다.

월맹군은 반대편 고지에 포를 끌고와서 프랑스 진지를 포격으로 두들겼고 프랑스가 대응포격을 해보려고 했지만 디엔비엔푸가 상대적으로 저지형이라 포격이 불가능했다. 위에서는 계속 월맹군 포대좀 어케해보라고 다그쳤지만 방법은 없고... 결국 멘붕한 포병대장은 권총자살하고 만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4월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폭우시즌이 시작됐다.

이 말이 뭐냐면 그나마 뜨문뜨문 오던 보급마저도 아예 끊어지게 된 것이다.

암만 세계최강의 군대라도 보급이 없으면 싸울 수 없는 법...


배고프고 목도 마르고... 폭우가 쏟아진다지만 정작 마실물이 없다는게 함정이었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같이 시작된  장티푸스, 이질로 인해 물은 사방에 널려 있었지만, 음용수가 없었던 것.

거기에 우기가 시작되면서 창궐한 모기떼들 때문에 발병하기 시작한 말라리아는 덤이었다.




마침내 5월 7일 8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스군은 견디다 못해 결국 항복 하고 만다.


다음날인 1954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회의 내용은 프랑스는 약한 베트남에게 얻어 터졌으므로 베트남을 점령할 자격이 박탈되게 된다는 평화합의성명이었다.

대부분 나라들은 베트남 독립에 동의했지만 2차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새로운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미국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읭?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이 어째서 베트남의 독립을 반대했지?

내 블로그에 와서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박박 우기던 좌빨 꼰대아재의 논리가 바로 위 사실을 근거로 한다.


여기에는 미국이 반대입장을 낼 수밖에 없는 몇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1950~1953까지 막대한 군병력과 물자, 비용을 퍼부은 한국전쟁이 명분에서나 실질에서나 별로 소득도 없이 끝났다.

(당시 분위기는 그랬고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한국은 100년동안 깡통차고 다닐거라는 생각이 당연시 되었으니까 말이다.)



둘째

에치슨 라인을 확보하여 태평양호수(Pacific Lake)를 만들어 제해권을 확보하려면 베트남이 공산화가 되면 절대로 안됐다.

여기서 잠시... 에치슨 라인이 뭐냐면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1950년 1월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모택동 두 돼지의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설정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이었다.





미국의 지역방위선은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라인 즉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거였는데 여기엔 한국하고 대만, 인도차이나반도가 미국의 방위에서 없었다. 그리고 바로 5개월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딘 애치슨은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재설정된 에치슨라인이 소위 말하는 독도를 기점으로 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이승만 라인이었는데, 훗날 김대중대통령에 의해 일본에게 유리하게 변경되었다.



아마 베트남이 공산화 안됐더라면 필리핀의 수빅 미군기지는 없었을거고 미군의 동북아시아 물류허브를 베트남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아시아 판도는 많이 달랐을거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는거지만 그때 당시에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어쩌면 대한민국이 베트남, 라오스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셋째

이게 중요한건데 사실은 프랑스와 베트콩의 전쟁은 대리전이었다.

미국이 직접 개입하기 좀 뭐하니까 예전에 연고가 있던 프랑스를 불러서 전쟁비용의 90%와 무기, 탄약을 줘가면서 싸우라고 독려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프랑스가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보급이 바닥나서 항복을 하니 미국으로선 열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열받은 미국은 독립국가 인정을 하지 않았고 북베트남보고 꼬우면 나랑 한판 뜨자고 하여 회담장 분위기가 급냉각된다.



넷째

미국이 베트콩의 성분을 잘못 파악했다는 데에 있다.

사실 1946년 까지는 미국이 물자도 나눠주고 유럽국가들의 식민지팽창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지원해준건데 호치민이 알고보니 공산주위자 였던 것.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에 사로잡혀서 살짝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공산주의의 "공"자만 나와도 분노하던 미국 국민들은 15년간 알고지낸 옆집 스미스 아저씨도 신고때리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이사람이 존.R.매카시



위스콘신주의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이사람이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내가 그 명단을 갖고 있다." 이런 말을 날려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근데 당시에 메카시한테 "야 너 그말 책임질수 있음? 팩트있음?"하고 몰아부쳤는데 매카시는 "증거는 있는데 일반에 공개하면 사회적 파장이 있으니까 비공개로 입증하겠다" 라고 해서 비난을 받게 된다.


결국 매카시가 몸담던 공화당에서조차 매카시를 비난하는 결의를 내고 정치생명이 끝나지만, 2003년 기밀해제되면서 매카시 주장이 사실이었다는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때 미국이 엄청난 혼란도 겪고 억울한 사람도 많이 나왔지만 내부 청소를 깨끗하게 단행하고 앞으로 나아갈 정책기조가 만들어지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매카시즘이 지금은 안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그와 무관하게 그 당시에는 미국엔 심각할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이 들끓었고 심지어 초대 FBI 국장 에드가 후버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정도였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이다"

                      

당시 미국은 여기저기서 빨간 선동하는 길거리 선동꾼들도 실제로 많았고 Communist Party USA라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실제 빨갱이 정당이 활개치던 시기였다. (60여년 전의 낡은 사상을 한국에선 지금까지 추종하는 세력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뿐) 암튼 이 이야기는 일단 베트남 전쟁의 배경을 이야기하자면 뺄수가 없는 부분이다. 정확히는 Progressive Party(진보당)이지만, 원래 출범할 당시는 미국 공산당이었다. 근데 세상 분위기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분위기다보니 슬쩍 이름을 모호하게 바꾼 것...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정당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해산되었다.





그리고 1947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비에트 연방하고 완전히 선을 긋는 발언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자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것이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다.

이 후,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과 방향타가 되는 정책이 되었고 수십년간 지구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됐다.

두 진영이 경쟁하면서 군사/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다시 베트남 상황으로 돌아가서...


어쨋든 링위에 올라간 놈은 프랑스였고 1954년 7월 20일 제네바에서 프랑스하고 호찌민 정부하고 협상을 한다.

그리고 그 협상에서 "2년뒤인 1956년 6월까지 남 북 총선거해서 단일 베트남 정부 수립하고 우리는 그거보고 철수할께"하는 합의를 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병신짓... 이것이 바로 김일성부터 시작해 김정일, 김정은, 한국에서는 현 문재인대통령이 추진하려 하는 연방제통일과 같다.


미국은 이제 프랑스가 싸놓은 똥을 치워야 할 상황이 됐다.


잘 보면 프랑스 vs 베트남의 전쟁은 제국주의 vs 민족주의 양상이었는데, 2년뒤 베트남 총선거가 열린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당연히 호치민의 압승으로 끝나는거였고 이건 볼 것고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남한과 북한이 연방제통일 총선거를 했을 때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북한은 100% 투표율이 나올 것이고, 친북성향의 대가리 빈 개돼지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100%가 나올리 만무하다.

그래서 연방제통일을 하면 북한주도의 공산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대한민국 개돼지들은 우리이니가 하는건 무조건 옳다고 박수를 쳐주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


이야기가 딴데로 샜다.


암튼...

그렇게 되면 베트남은 당연히 공산화가 되는거고 그런 결과가 되면 도미노 효과로 인해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의 팽창은 불보듯 뻔한 것.



그래서 미국은 아직 덜 빨간 남베트남에 친미 반공정부를 수립해서 적화를 막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트남은 그때까지 유명무실한 황제가 있긴 있었는데, 바로 응오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였다. 사실 예전에 망했어야 하지만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위해 얼굴마담으로 세워둔 인물. 베트남인들에게 식민지배라면 이가 갈리는데 식민시대 로봇황제로 새정부 세우면 반감만 커지는건 당연한 일.


그냥 새정부를 안세우고말지...





그래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이라는 철저한 반공주의자 인물이 낙점이 된다.


그리고1955년 10월 26일 공산주의와 타협은 없다! 남북선거 무효를 외치며 남쪽의 단독선거로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베트남의 분단체제가 확립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런 남북분단으로 오히려 곤란한 상황에 빠진건 호치민이었다.

오랜 전쟁은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북베트남은 아직 정치체제나 사회질서도 확립되지 않았고 도와준다던 스탈린 모택동 두 돼지들은 연락도 안되었다. 오히려 미국+남베트남 연합의 병력들이 밀어붙이면 언제라도 백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제 남베트남에 지엠 친미정부를 세우고 베트남은 자유민주주의국가임을 선포하고 지지해준다. 디엔비엔푸 전투까지는 식민정책을 앞세운 열강의 패권주의 vs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의 양상이었지만, 이제 미국의 개입한 이 후 공산권의 지원을 받는 공산세력 vs 서구 자유주의의 지원을 받는 자유세력의 대결 양상이 된 것.


응오딘지엠 정부는 초기에는 정치를 어느정도 잘 하는 듯 보였고 지엠정부의 정치기본노선은 반공, 보수였다.

"때려잡자 호치민! 무찌르자 공산당!" 이 기본 슬로건이었단 말.

그러니 미국입장에서는 뭐 "음 잘하고있는 모양이군" 이정도로만 생각하게 된다.

 

애초에 호치민이 제안한 1956년 남북총선도 거부하고 독자적인 남베트남 정부를 수립한 것도 "공산주의자들하고는 협상같은거 없어!" 이런 강직(?)한 반공정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데 항상 모든 역사가 그렇듯 문제는 전혀 생각치 못한데서 발생한다.


그 시작은 응오딘지엠의 주변권력자들의 부패와 부정였는데,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지엠 대통령이 독재하고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건 진짜 원인은 아니다. 남베트남 사회가 미국이 생각하는 것만큼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엔 국민의식이 너무 낮았다고 얘기하는게 아마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일단 독재라고 불릴만큼 긴 시간을 통치한것도 아니고, 일단 모양새 자체는 정식 의회를 가진 합법정부 아래서 남베트남 정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응오딘지엠도 문제였지만, 응오딘지엠과 함께 가야할 지방 호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다른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동남아권 국가들은 아직도 지방호족이 득세하는게 현실이다.


일례로 2009년 민다나오의 마긴다나오주(州)에서 선거기간에 시장 후보와 기자단을 싹쓸이해서 처형한 근대사에 유래없는 일이 있었다. 그게 그동네 호족 명문가인 안달 암파투안이 대대로 해처먹고있었는데 "민주선거가 좋은것이다!" 하면서 자기 밑에 일하던 놈이 출마하려고 하니까 자기 사병(私兵)들 시켜서 기자단하고 시찰중이던 시장후보를 모조리 암살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전세계적인 여론이 크게 들끓었지만 아로요 가문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지지호족세력이라 나중에 유야무야 끝이 나버린다.


※ 필리핀은 아로요 VS 아키노 가문이 대통령을 서로 배출하는 혈통세력



각설하고....

 

독재는 호치민 패거리가 갖다붙인 말이고(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군중들은 자세한거 싫어한다. MB OUT도 그래서 나온 것) 디엠이 실정(失政)을 하게 된 이유에 디엠본인이 문제인 이유도 있지만, 이 지방호족들이 크게 관련되어 있는데, 남베트남의 호족세력들은 그전에는 누리보지 못한 경제적 풍요와 막강한 권력이 한순간에 쥐게 되었다.


누구때문에?


미국때문에...


그냥 공산주의 OUT! 만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해준거다.

어쨌든 사회의 부의 편중과 부정부패는 확산되어갔고 이로 인해 사회불만세력이 나타나게 됨과 동시에 얘네들을 살살 긁는 선동꾼들(우리나라로 치면 종북단체 및 기타 세력들)이 나타났는데, 이렇게해서 남베트남에서는 월맹의 지원을 받는 산하 단체들이 지들끼리 국가에 준하는 행정체제를 구축해버린다. 그중 가장 큰게 종교단체였는데 이는 불교와 천주교 양쪽에 큰 세력으로 자리잡아 민중들의 선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자신들이 추종하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숙청됨)




나중에 남베트남 멸망하고 사이공시를 호치민시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얘네들이 자경단 비스무리한 조직을 만들게 되고 이게 시민군으로 발전해서 정부에 폭력으로 대항하다가, 2차 전쟁 개전 후에는 베트콩에 전부 편입되어버린다. 결국 1960년 12월 20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지엠 반대세력들이 민족해방전선 (NLF : Nation Liberation Front)을 결성한다.



둘째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건 응오딘지엠의 제수씨였던 마담 누 였다.





인터넷에서 많이 본 사진이다.

틱광둑이라는 승려가 소신공양을 하는 순간인데, 이 한사람의 분신자살이 이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될지는 아마 당시엔 누구도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일단 지엠대통령은 카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지엠의 가장 최측근은  제수씨였던 마담 누였다.(위 사진)


원래 이름은 트랑 르 수안인데 지엠 대통령 동생인 응오딘누의 와이프였다.

응오딘지엠은 정부 요직의 관료를 가족들로 채웠는데, 동생 응오딘누는 내무장관, 마담누의 아빠는 미국 대사, 엄마는 유엔대표, 마담누의 삼촌들은 각료로 임명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미혼이라 마담누는 영부인의 자격으로 대통령궁에서 살게했다. 그런데, 이 응오딘디엠과 마담 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디엠이 마담 누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나게 된다.


알고보니 이 마담누의 실체는 골이 텅 빈 된장녀였던 것.

비싼돈 처들여서 파티하고 놀아제끼는건 일상이고 여성부 비스무리한걸 만들어서 이상한 법을 제정, 이혼, 간통, 피임, 음주, 춤, 무당, 노름은 다 불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마담 누도 카톨릭 신자였는데, 위에 얘기한 틱광둑 스님이 분신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마담누에서 비롯된다.



1963년...

 

호구남 지엠은 마담 누하고 뭔 얘기를 나눴는지 베트남 내의 불교사찰을 폐지한다는 이상한 법을 의회 통과시켰고 그리고 같은해 5월 석가탄신일에 불교 행사를 다 금지시켜버리게 된다.





"이제부터 절금지! 스님금지!" 


당연히 불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지금도 베트남 국민 75%가 불교신잔데, 정말 후안무치한 법이 아닐 수 없었으며 당연히 여기저기서 시위가 일어났고 지엠정부는 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을 해버리는 바람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종교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1963년 6월 11일 틱광둑이라는 승려가 목숨을 불사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어쩌면 그냥 극렬분자의 분신자살정도로 끝날 일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의 물꼬를 터준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마담 누였다. 이미 그전부터 된장녀 짓을 하도 하고 다녀서 콜린스 미국 대사가 마담누를 정치에서 좀 물러나게 하라고 지엠 대통령한테 몇번 얘기를 할 정도였다.


마담 누는 이 틱광둑 분신사건에 대해서 정말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리는데...

 

"어머 라이브로 바베큐 되는 중 또 나타나면 이번엔 나 꼭가서 구경해야지!" 라는 어이없는 메가톤급 발언을 했고






아니나다를까 틱광둑 이후로 6명의 분신자가 더 나타났고 종교탄압에 대한 시위+소요사태를 이용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분탕질로 남베트남 사회는 엉망이되어갔는데, 한국으로 치면 2008년 광우병 폭동때 종북단체들이 개입해서 선동질하며 폭력시위로 변질시킨 것과 100% 똑같다. 


놀팅 대사는 마담누좀 빨리 어떻게 좀 하라고 닥달했지만, 지엠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할 시기는 한참전에 지났다.

단순히 제수씨였다면 어떻게 정리를 했겠지만, 그렇게 못했다.

1963년 8월...드디어 이성을 잃은 지엠은 계엄을 선포하고 절에 군부대를 투입해서 1,400여명의 승려를 사찰폐지법(?) 위반으로 체포하게 된다. 그리고 절에 군대가 투입되어 승려들을 사살하고 곤봉으로 뚜들겨 패는 모습을 마담 누에게 보여주면서 마담 누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고 마담 누는 자신에게 충실한 지엠의 행동에 기뻐하였다.





이 미친년은 그날 저녁 언론 인터뷰에서 "이 때가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라고 끝없는 망언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남베트남은 이미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고 결국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나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 종교탄압에 대한 불만을 그냥 놓칠 호치민이 아니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감을 직감한 미국은 같은해 8월 지엠을 지지했던 놀팅 대사를 소환하고 헨리 캐봇 로지 대사를 급파했다.

로지는 시급히 남베트남의 상황을 파악한뒤 워싱턴에 1급기밀문서를 타전하게 되는데, 내용은 지엠정부는 이미 절망적 상태이며 대다수의 남베트남 국민들이 호치민 세력(북베트남 간첩, 좌익세력 등)에 의해 선동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1963년 11월 1일 남베트남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된다. 




응오딘지엠 대통령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 는 쿠데타를 일으킨 두옹반민 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근데 재미있는건 그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 마담누는 미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남편(?)이 사망한 걸 알고는 이탈리아로 망명해버리고 만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일부 학자들은 호치민이 미인계를 쓴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


결국 엎어진 물은 어쩔수 없어서 미국은 쿠데타 세력에 대해 실낱같은 기대를 가졌다.

쿠테타 세력이 독재권을 뒤엎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길 기대했던 것...


근데 이 쿠테타 세력들이 NLF(남베트남해방전선, 우리나라로 치면 통진당같은 종북세력)에 우호적인 것이 아닌가...


"북베트남 님들... 미국놈들 제껴버리고 우리민족끼리 대화합시다!"


결국 미국은 믿을놈 하나도 없구나 하고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즉각 본격개입을 시작해서 1962년 남베트남 군사원조 사령부 (MAC-V : 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를 설치하고 준 전시상태에 돌입한다.

직접 나서서 한판 떠야 결말이 나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 그렇게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남 북의 대립과 긴장은 높아져가다가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게된다. 



[아래부터는 엔하위키 참조]


1964.8.2. 

통킹만 공해상에서 정찰임무(코드명 DESOTO Patrols; 북베트남의 해안레이더를 가동시켜 레이더망을 파악하려던 작전)중이던 미 구축함 매덕스(Maddox)호를 향해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했으나, 매덕스호는 어뢰공격은 피하고 기관총 공격에 의한 아주 경미한 손상을 입었음


1964.8.3. 

미 국무성은 북베트남에 강력히 항의하며 더 이상 도발할 경우 중대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


1964.8.4. 

터너 조이(C. Turner Joy)호와 함께 다시 정찰임무에 나선 매독스호는 북베트남으로부터 공격의 전조로 추정되는 레이더 시그널을 받고 있었고,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소나 담당병사가 자신의 배의 프로펠러 소리를 북베트남의 어뢰공격으로 착각하여 어뢰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함. 나중에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그날 밤 북베트남의 공격이 실제론 없었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 당시 미군 당국과 함정의 승무원들은 공격이 있었다고 확신함.







즉, 미국이 전쟁을 촉발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격받았다!' 이라고 허위보고 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미 의회는 베트남 전쟁을 승인하고 1965.8.5. 미 항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호와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호에서 함재기들이 발진하여 북베트남의 어뢰정 기지를 폭격하였다.


이렇게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이고 미국의 국익을 위했던 어쨌건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지, 아무 이유없이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은 당시 매우 복잡다양했던 남베트남의 정세와 국제 이해관계도 모르면서 극좌언론의 사설들만 주워 듣고는 월남전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부득부득 우기는 극좌 꼰대아저씨 공부좀 하시라고 포스팅 함.





1954년 7월 21일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월남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권인 월맹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60년 12월 공산 월맹의 지원으로 월남 내 공산조직인 월남민족 자유전선이 설립되어 월남 정부에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본격적인 월남전이 시작되었다. 신생독립국 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미국은 1964년 이후 연간 500억 달러를 퍼부으며 53만 여명을 파견, 전사자 5만 8256명 부상자 20만명이라는 피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악화된 여론 및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발을 빼기 위해 1968년 5월 10일 파리에서 월맹과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한다.





당시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100만톤의 식량을 비롯한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대남적화 공세를 멈추지 않았던 월맹이 평화협상에 나선 목적은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 봉기를 통해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세우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측에서 평화협상을 제의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결국은 미국을내쫓기 위해서 한 거였거든요. 미국을 내쫓으면 공산화 시킬수 있다. 평화회담을 하기전에도, 할때에도 , 한 다음에도 무력남침 공산화 전략은 변함이 없었거든요. 겉으론 변한것 같아서 거기에 속았죠. 그래서 월남은 망한 거죠."

 

 

월남의 정치 상황은 이러한 월맹의 치밀함과는 대조적이었는데, 전쟁이 치열했던 1967년 9월3일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난립했다. 이 선거에서 패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 변호사는 외세 배척및 우리민족 끼리를 내세우며 동족 살상,월맹에 대한 폭격금지, 미군철수, 조속한 남북 평화회담등을 주장했고 이같은 발언은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여론을 자극했다. 마치 지금의 대한민국내 종북세력들 처럼...





 

"우리끼리 싸움을 해서 말이야 더군다나 외국군까지 불러들여서 여기가 피바다가 되었으니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안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평화 협정을 맺어서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해 나가겠다. 우리는 한민족이다. 이렇게 자꾸 주장을 하는데 공산당 당원이었던 거야. 몰랐죠."





파리에서의 비밀협상 진행이 알려진 후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5년여 협상끝에 월맹에 40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등 12개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월맹이 심리전, 월맹내 사회불안,미국내 반전 분위기등에 시달리던 미군은 월남 야당의 철군주장을 빌미로 1973년 3월 전면 철수하게 된다.


 

미군 철수의 결정적 원인은 택토 공세때문이라고 할수있다.

택토 (월남의 구정 연휴) 공세란 월맹의 기습공세로 미대사관이 점령당하는 등 위리를 맞았으나 미군의 반격으로 9만명이상의 월맹군이 사살됨





"미국이 발을 뺀 근본적인 원인은요. 미국 대사관이 점령을 당하니까 말이야 앞으로 아무리 싸워도 끝이 안나겠구나.그들이 미국을 내쫓기 위해서한거죠. 월맹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었는데도 그건 전부 외면하고 신문에서는 미 대사관이 점령당했다. 미군이 몰살당했다 하니까 정말 이쪽이 사실은 크게 이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배하고있는 것으로 인식 되어 버렸습니다. 다 이긴 전쟁이었는데.다평정하고 월맹군이 산악지역에 조금 남아있었는데 월남 통일을 못하고 미군이 나가버렸죠."



13만 군사중 9만명 이상을 잃은채 미군의 공격을 피해 산악 지역으로 피했던 월맹군.

하지만 미군은 월맹군을 완전 섬멸하지 못한채 반전 여론에 의해 철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장비도 훨씬 우월한 적을 대면해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면이든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려 했죠.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전선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철수 당시 미국은 월남과 방위 조약을 체결하면서 월맹이 평화협정을 파기하면 해군및 공군력을 동원하여 월맹에 대한 폭격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굳게 약속했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와 장갑차 400대 항공기 700대등 10억 달러 이상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함으로써 그무렵 월남의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의 남북의 경제력 차이와 미군의 철저한 유사시 지원 약속은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 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미국은 그럴 것이라 판단했다.





"(평화협정 채결 후) 티우 대통령을 만났어요. 월맹이 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죠. 월맹은 전쟁할 능력이 없다. 너무 가난해서 하루 두끼도 못먹는다. 그것도 소금 바찬으로 연명하고있다. 미국이 4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협정을 깰수 있겠는가?10년 동안은 못 나온다. 그 기간동안 석유개발등을 통해 월맹과 격차를 벌여 놓으면, 월맹은 끝내 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월남에서는 파리에서 채결된 평화협정을 완전히 믿고 있었죠. 협정을 통해 모든게 해결될것이라고.."




이같은 믿음은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이 월맹을 과소평가하고 총체적 안보불감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부, 승려, 언론인, 학생등 좌익 인사들은 이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티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또 월남 정부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만에 반정부 게릴라 단체인 베트남 임시혁명 정부청사에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까지 많은 공산 간첩이 침투해 있었다.


1967년 대선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를 비롯해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와 대통령 비서실장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경찰장관이었던 창반만, 대통령궁을 폭격한 월남 공군 대위 구엔타인충등 많은 정치인과 관료, 군인 언론인, 종교인들이 공산간첩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수있다.





그리고 이러한 월맹의 치밀한 정보수집과는 대조적으로 월남의 대공 정보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못했다.





"우리는 제복을 입은 운전사가 모는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타고 부유한 자본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드러내놓고 왕래하며 상황을 염탐했습니다. 혹시라도 계획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이었죠."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면 정보기관들이 또 바뀌고 이러다 보니 정보기관들이 완전히 무력화 되어 이북(월맹)의 정보가 많은데 하나도 알아내지 못한 거죠."





공산세력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수십개의 언론사를 통해 정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우익인사들을'무식한 전쟁광'으로 매도하는 한편 무자비하게 암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 중산층,언론인등 다수의 우익들은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결국 소수의 조직화된 좌익들의 공세에 당할수 밖에 없었다.

 

1975년 3월 10일 월맹은 파리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월남에 이미 오래전부터 침입해 있던 간첩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는 동시에 18개 사단이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즉각 전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해서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는 티우 대통령의 호소를 외면하고 짜후탄 신부와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를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분열과 총체적 부패 그리고 의욕상실에 빠져있던 월남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 겠다는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1975.3.26  월남의 제 2도시 '다낭' 함락

1975.4.21  티우 대통령 하야. 해외 도피

1975.4.30 월맹의 총공세 50여 일만에 사이공 함락

1975.4.30 자유월남 패망



군사, 경제력 및 인구등 모든 면에서 월맹을 압도했던 자유 월남은 결국 월맹의 총공세 이후 50여일만인 4월30일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이공 함락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은 물론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며 월남 패망에 앞장 섰던 짠후탄 신부 등 종교인, 교수, 학생 및 통일 운동가 까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어 졌고 대부분 처형되는 등 수백만 명이 처형, 학살되었다.


 


"베트콩으로 활동한 월남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해 제거해 버렸습니다."

리 라닝 ('베트콩과 월맹의 내막'의 저자)





이렇게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인사들까지 처형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런일이 뜻밖이라고 생각하냐구요? 강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정도의 일에 그리 놀라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지킬줄 몰랐고, 진실을 알면서 침묵하기만 했고, 외면하기만 했기에 자유의땅 사이공은 함락이후 너무나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결국,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는 월남 국민들에게 평화 협정과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 조각일 뿐인 것...

 

공산화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이어진 보트피플들의 월남 탈출.

약 106만명으로 추정되는 보트 피플중 11만명이 배가 전복되어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것으로 추정되고있다.




당시 공산 월맹이 구사한 전술

 


'통일 전선전술'

 

 

약 6000여명의 정예 공산당원들을 월남에 침투시킴

민족을 내세워 월남의 종교인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등을 배후 조종, 반정부. 반미 시위를 주도(남한의 종북세력과 똑같다)

결국 월남은 내부분열.

미군철수.

주적계념, 경계심 무너짐.

 월맹의 공격.

(월남의 전투기조종사는 자기가 지켜야할 대통령궁으로 기수를돌려 맹렬한 폭격을 가함.

↓  

월남은 이미 전의 상실.

자유월남은 1975년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짐



왠 극좌 아재가 월남전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댓글을 달길래 포스팅하게 되었음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남군정서, 북군정서 등에 스며 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 김좌진, 김규식(나중에 박사라고 된 김규식이 아님) 등 우리 운동에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출처 : 백범일지





김좌진(1889-1930) 암살 : 청산리전투 지휘.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살해당함



백광운(?-1924) 암살 : 무장독립운동가로 사이토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주도, 만주독립군 친임시정부파 참의부 소속이었다.

만주독립군 친공산계열 통의부 소속 문학빈에게 살해당함.



김규식(1882-1931) 암살 : 청산리전투 참전. 공산주의자 최악에게 살해당함.



박용만(1881년 ~ 1928년)암살 :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창설. 의열단원 이해명(이구연)에게 살해 당함. 



자유시참변(1921) : 이르쿠츠크파 공산계가 소련과 손잡고 상해파 공산계 및 민족주의계 독립군 1천명을 사살하거나 소련으로 납치해 버린 사건. 이사건으로 만주 무장투쟁 동력 영구상실됨. 홍범도도 이때 포로로 끌려갔다.



광우병 사태의 진실.

명강의


이승만이 징집카드의 국적에 일본으로 표기했다고 진보언론들이 물만난 고기마냥 물고 뜯고 맛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뜬금없이 안찬호 선생은 왜 나오냐고?

왜나면 안창호 선생도 출입국 카드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를 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출입국카드 국적란의 일본표기(안창호)



그럼 안창호 선생이 친일파인가?

안창호 선생이 출입국카드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했다고 해서 안창호의 국가정체성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승만의 징집카드 국적란(일본으로 표기함)



위 이미지는 요즘 이슈사 되고 있는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한 이승만의 징집카드다.

반면 당시 90%의 미주 한인들은 korea 또는 corea로 표기했다. 



팩트요약

  • 징집카드의 국적란에 이승만은 일본으로 표기함
  • 도산 안창호 선생도 출입국카드의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함




문제는 진보언론들이 전후맥락 무시하고 물고늘어지면서 이승만의 정체성을 깎아내리려는데에만 혈안이 되있다는건데 다른 팩트들과의 관계에서 보면 해석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하 진보언론들이 말하지 않은 팩트 정리해보자.



안창호는 출입국문서 국적란에 특이하게 한국이라고 적었다가 지우고 일본이라고 썼다. 

아마도 당시의 조선은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안창호 선생은 한국이라 적었다가 아차 싶어 지우고 일본이라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로 안창호는 친일파라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진보언론들의 이승만 징집카드 논리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도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공개한 20여개의 이승만 행정문건 중 일본국적 표기 문건은 단 1건이다. 

나머지는 모두 korea라고 표기했다. 진보언론들은 나머지 자료에는 늘 그래왔듯이 입을 다물고 하나만 물고늘어진다. 그것도 법적 국적취득 여부와 무관하며 개인의 국가정체성을 투사할 이유가 없는 2400만명에게 일괄 배부한 형식적 행정서류 하나만 말이다.


이승만의 국적의식을 보다 잘 반영하는 서류는 아마 외국인등록증이 아닐까?




분명히 국적에 korea라고 적혀있다. 

진보언론이나 좌파진영에서 이승만 국적 표기가지고 물고늘어지는데 왜 제시 자료는 항상 징집카드 저거 하나뿐일까?

그 이유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서다.



이승만은 출입국서류를 비롯한 다른 모든 서류에는 korea로 표기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1918년 하와이에서는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지 수십건의 문건에서 감춰오던 친일의 의지와 신념을 그때 딱 한번 형식적인 행정서류에 진솔하게 표현했다고 가정한다는 건 역사는 커녕 소설로도 안 쳐줄 망상이다. 


역사는 흔히 퍼즐에 비유된다. 


하나의 퍼즐조각(자료)은 다른 모든 퍼즐조각과 아구를 맞춰서 해석해야 한다는 건 역사학의 상식이다. 1918년 10월은 이승만이 미 대통령에게 한국 독립시켜달라고 수차례 편지보내던 그 무렵이다. 그러던 이승만이 의례적인 행정서류 하나 받더니 급진지해져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한 끝에 부들부들 떨며 국적란에 일본이라고 쓰는 상황을 상상하며 그걸 역사적 진실이라고 내놓는 게 진보좌파 편향 역사학의 참담한 수준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상식적인 전제는 


  1. 2400만에게 의례 발송된 행정서류는 그 작성자의 신념을 단정할만한 핵심적인 정보를 주지 않는다.
  2. 징집카드를 어떻게 작성하느냐는 독립운동의 행보나 미국의 외교정책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외교독립운동가 입장에서 거기에 의미를 두거나 특별히 신경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3. 행정서류는 신념표현을 요구하지도, 환경변화나 실천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며, 다만 법적 사실을 요구할 뿐이다. 이상을 고려할 때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이승만은 하와이 행정당국에 괜히 책잡히기 '귀찮아서' 형식적인 서류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법적 사실에 따라 공란을 채웠다는 것이다.

그 뿐이다. 
이 시답잖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부류는 이승만을 현재 정치의 맥락에서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실성한 진보좌파들뿐이다. 







나중에 진짜 '친일파 후손'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포스팅을 할 계획이지만, 그전에 진보진영에서 유독 보수진영에 친일프레임을 씌우고 친일 선동을 할 때 안중근의사만을 언급하는 이유에 대해 포스팅 해본다.







일제강점기 시절 수동적인 항일운동에서 탈피하여 일본 인사들을 향해 물리적 공격으로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중 대표적인 인물은 안중근의사와 윤봉길의사가 있다. 안중근의사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하얼빈 역에 잠입,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윤봉길의사는 도시락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를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독립운동의 경중을 가릴 수 없는 위대한 두 독립운동가들중 유독 안중근의사만 언급되곤 한다.

특히 진보진영에서는 친일관련 선동을 할 때 안중근의사의 손바닥도장을 많이 이용한다.


이를 보다못한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는 안중근의사의 손바닥 도장이 진보진영의 선동에 이용되는 것이 불편해서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여러차례 신싱당부하고 경고도 했지만, 언제 진보진영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가. 해마다 친일논란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안중근의사와 손바닥도장을 전단지나 인터넷 매체에 이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진보진영에서는 안중근의사만 찾는걸까?

유관순열사도 있고 윤봉길의사도 있고 청산리전투 김좌진장군도 있는데?

게다가 유관순 열사는 진보진영 전문인 감성팔이 선동에 제격일 것 같은데 말이다.

(진보진영이 유관순 열사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http://inthink.tistory.com/17 포스팅을 보면 알 수 있음)




이유는 간단하다.


선동하려는 대상이 "어? 이상한데? 왜그렇지?" 하는 의구심을 갖을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무슨말인고 하니 윤봉길의사를 선동에 이용할 경우 그 후손들이 반발할 것이고 이것이 이슈화되면 평소 진보매체의 선동으로 친일파=보수세력, 새누리당으로 알고 있었던 어린 학생들, 대중들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다.




그럼 그 새로운 사실이란게 뭐지?





다름아닌 윤봉길의사의 후손이 새누리당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교조나 진보단체의 온갖 선동으로 새누리당, 보수세력은 친일파라고 배웠는데 어째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진보쪽에서 윤봉길의사를 선동에 이용하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후손 뿐만이 아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하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인 김좌진장군의 손녀가 한나라당 의원이다. (좌: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과 김을동의원. 우:김을동 전 의원)


좌파세력들은 김좌진, 김두한 - 김을동의원의 연결을 끊고자 갖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선동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은 김두한이 김좌진장군 아들이 아니라고 떠들어 댔는데  근거를 제시하라고 하자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나중에 김을동 의원에게 자신이 허위주장을 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더 웃긴건 위연홍이라는 중국여자가 김좌진장군의 외손녀라고 주장을 하여 논란이 불거졌을 때에도 김을동의원이 유전자검사를 제안하자 중국으로 줄행랑을 치고 돌아오지 않았다. (위연홍이 국가보훈처에 근거를 제시했지만, 허위사실이 너무 많아 거부당함)







진보진영에서 추앙하는 김구선생의 아들인 김신은 박정희대통령의 5.16군사혁명에 동참했으며, 그 후손들 역시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있다.


이런 놀라운 사실들을 대중들이 알게 되면 그동안 좌파진영에서 보고 배웠던 친일파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고 왜 저들이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소위 말하는 보수세력이 되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수밖에 없다. 







그런데 실제로 인터넷에는 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지 궁금해서 질문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좌파성향의 네티즌들은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한나라당으로부터 돈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ㅋㅋㅋ


질문자는 왜 윤봉길의사의 후손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데, 댓글들은 엉뚱한 소리들을 하고 있다.

참 빈곤하고 저렴한 답변이다.


그도 그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당들의 계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긴 속이 많이 쓰리겠지...

윤봉길의사 후손이나 김구선생 후손들이 진보였다면...

정말 두고두고 사골국 우려먹듯 선동에 효과적으로 이용했을텐데 말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굴욕적으로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해방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들의 마음 속엔 반일정서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특히 스포츠에서의 한일전은 온 국민의 지대한 관심사였고 선수들 역시 한일전에서만큼은 죽을 각오로 투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국민들은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쪽바리들을 때려눕히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꼈다.


그러다보니 '친일파'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에서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는 굉장히 민감한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엉뚱하게 선동에 이용하는 세력이 있으니...


바로 좌파세력들이다.




사람들은 대한민국 좌파세력의 뿌리가 진짜 친일세력이었던건 알까?

지금 더불어민주당(구 민주당)에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악질 친일파의 후손들이 대거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까?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건 현 새누리당(한나라당)은 친일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방 이후 친일지주세력의 당이었던 한민당이 자유당 탈당파와 손잡고 만든게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의 뿌리)이니 민주당을 지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뿌리가 친일이니 독립운동가들 때려잡던 일제헌병의 후손들이 민주당에서 국회의원질을 하고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글을 마치며...


진보진영에 부탁하건데 당신들의 선동에 독립운동가분들을 이용하지 말길 바란다.





문재인 의원이 박근혜의 건국발언을 두고 대한민국의 건국은 3.1운동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쌩뚱맞은 발언을 하여 논란이다.

문재인 본인이 특전사 출신인데다가 부모가 6.25때 미군의 도움으로 무사히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적어도 안보나 국가관 만큼은 보수적일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된게 하는 발언마다 좌파 급진적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오랜 숙원이었고 현재 김정은의 희망사항인 연방제통일(적화통일)을 지지하질 않나......

북한의 핵위협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줄 사드배치를 반대하질 않나......

철없이 부화뇌동하는 애들 틈바구니에 껴서 국가보안법 해체 프랭카드나 들고 있질 않나......

단식하는 국민을 위로하고 말리기는 커녕 옆에 앉아서 같이 단식을 하질 않나......



어쨌든 문재인 의원이 대한민국의 건국은 3.1운동으로 이루어졌다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다.


문재인 의원이 이런 발언을 하자 진보진영에선 너나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뜬금없이 3.1운동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건국되었다고 떠들어 대고 있는데 그런자들이 왜 3.1운동에 무관심하고 유관순 열사를 홀대했나?




진보성향의 학자들이 만들고 현재 대부분의 학교에서 사용되어지는 교과서에는 유관순열사에 대한 내용이 단 한줄도 없다.


이유가??


진보학자들은 유관순이 친일파들이 만들어놓은 가공의 인물이라는 미명하에 교과서에서 빼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세운나라, 북한은 친일파청산이 잘된 나라라는 논리의 대한민국의 초대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종북사관때문이다. 3.1절을 무시하고 3.1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유관순 열사를 홀대했던 자들이 이제와서는 대한민국 건국이 3.1절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나 느끼지만 진보좌파의 이중잣대는 끝이 없는 것 같다.


 


3.1운동이란?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 또는 3·1 인민봉기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유관순열사


유관순 열사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초등부 3학년에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 내 가혹행위로 인해 1920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2013년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되어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있다.







요즘 진보언론들과 진보진영에서는 녹조라떼 운운하며 슬슬 4대강 선동에 또 시동을 걸고 있다.

또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우매한 네티즌들이 소셜, 뉴스댓글 등에서 왜곡된 선동 댓글에 좋아요를 눌러 대고 있다.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잘못된 점에 대한 합리적 비판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막연한 증오심을 바탕으로한 비판은 대중들에게 잘못된 지식과 거짓을 전달하게 된다. 

 

전자는 합리적 비판이고 후자는 선동이다.

 

이명박의 4대강이 성공한다면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누구에게 손해가 돌아갈지를 따져본다면 왜 좌파단체와 진보언론들이 4대강을 깍아내리려 하는지 답은 나온다. 이미 이명박이 추진한 2가지 굵직한 정책인 청계전복원사업과 버스환승제가 큰 성공을 했기 때문에 4대강 하나라도 짓뭉개놔야 진보진영의 입지를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대강이 성공하면 모든 국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이미 4대강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당신은 근래에 TV에서 수재민돕기 ARS문구를 본 적이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4대강 공사 후부터 매년 있어왔던 홍수로 인한 피해와 수재민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소방방재청의 자료를 보면 4대강 공사를 하기 이전에는 매년 수백억원 ~ 수천억원의 피해액이 발생하였지만, 4대강 공사 이후에는 피해액이 급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년 물난리를 겪을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에서 4대강 공사는 이명박이 아니라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해야만 했던 사업이다.

 

 

그럼 4대강이 성공할수록 손해인 사람들은 누구?

 

바로 현 야당쪽, 즉 진보진영에겐 정치적으로 손해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명박이 버스환승제로 서민들 다리를 편하게 해주었고 청계천으로 서울 물난리 막고 훌륭한 쉼터를 제공해주었으며 4대강으로 홍수피해를 크게 줄였으니 국민들이 보수정당출신 대통령이 일 잘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 진보정당에겐 큰 정치적 손해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내가 무슨 이명박의 4대강 홍보대사나 알밥? 정도로 여길지도 모르겠는데, 난 이명박을 싫어한다.

이명박정부와 우리 집안의 사연때문에 나에게 있어 이명박은 천하의 개x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좋아하는 분들껜 죄송하다.

 

 

하지만 난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건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건간에 잘한 일은 잘했다, 못한 일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더 성숙해지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좋아하진 않지만, 요즘 진보언론의 4대강에 대한 선동적인 기사들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어 본 포스팅을 작성하게 되었다.

 

 

 

 

 

 

어쨌건 야권에겐 4대강의 성공이 정치적으로 큰 손해다보니 4대강은 실패했다고 까고 진보언론도 합심하여 녹조라떼니 뭐니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면서 까는 것 아니겠나.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도 빈번하게 발생했던 녹조현상을 마치 4대강 공사를 한 이후부터 생겨난 것처럼 선동을 해야 국민들에게 4대강에 대한 안좋은 인식을 심어줄테니 말이다.

 

녹조현상은 더위 뿐만 아니라 생활오수 등으로 인한 오염물질에 의해서도 생긴다.

그런데 진보진영이 참 웃긴게 서울시 산하기관인 하수처리장에서 2013 ~ 2015년까지 3년동안 한곳에서만 특이하게 104차례 오물(똥물)을 무단 방류한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토록 생태계와 자연을 끔찍하게 생각하던 사람들과 환경단체들이 말이다.

 

 

 

 

 

 

이들은 한강에 똥물을 무단방류하고 매년 1억원의 성과금을 받았다는데, 천하의 꿀직업이 아닐 수 없다.

 

검색을 통해 이 글을 보는 당신에게 묻는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는걸 알고는 있었나?

 

아마도 몰랐을 것이고 모를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녹조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똥물을 100차례 넘게 방류한 이 사건은 종편에서만 한두번 다루어 졌고 진보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겨례와 경향, 오마이뉴스 등은 입을 꾸욱 다물었고 한줄의 기사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니 소리소문 없이... 은근슬쩍 구렁이 담넘어가듯 묻혀버릴 수밖에 없는 사건이 되었다.

 

 

왜? 

 

강력한 권력을 가진 박원순 서울시장이 관련된 사건이고 4대강에 흠집을 내서 다음 대선때 정권을 잡는데 유리하게 끌고 가야 하는데, 이러한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권가도에 흠이 생기고 녹조라떼 선동에 차질을 빚기 때문은 아닐까?

 

 

 

 

 

자...

 

잠시만 눈을 감고.....

그리고 마음을 비워보자.

 

보수니 진보니, 좌파니 우파니 다 떠나서 잠시만 생각에 잠겨보자.

 

만약 이 중차대한 사건이 새누리당 오세훈 서울시장이나 이명박 서울시장 임기때 발생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한번 상상해 보자.

진보언론들은 연일 4대강과 연결지어서 오세훈과 이명박이 시민들에게 똥물을 마시게 했다며 몇달동안 기사를 쏟아냈을테고 학생들은 진보단체의 선동에 이끌려나와 똥물마시기 싫다며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지 않았을까?

 

 

 

 

 

 

서울시 산하기관에서 한강 하류로 똥물을 무단방류하여 한강물을 오염시키고도 녹조라떼 드립을 치는 저 서울시장님을 보자.

연구원들과 함께 수질을 조사하러 갔으면 당연히 수질연구에 쓰이는 전용 채집용기가 있을텐데도 녹조라떼라는 신조어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테아크아웃 컵에 녹조를 담은 저 모습...

 

우리는 흔히 저런 행동을 우리는 가증스럽다고 말한다.

 

 

우리편이 관련된 사건이니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를 퇴보하게 만드는 '진영논리'다.

 

 

 

 

 

팩트요약

  • 녹조는 폭염으로 인한 자연현상이며 매년 발생하던 현상
  • 박원순 서울시 산하기관에서 104차례 똥물을 무단방류하여 녹조발생에 일조함
  • 그리고 그 산하기관의 임원들은 매년 성과금으로 1억씩 받음
  • 4대강으로 인해 어느날부터인가 TV에서 수재민돕기 ARS 문구가 사라짐
  • 4대강으로 인한 홍수예방으로 매년 수천억원 낭비되던 것이 수십억원으로 급감함
 
 
 

 

 

감성이 이성을 앞서면 시야가 좁아진다.

 

얼마전 4대강에서 생겨난 큰빗이끼벌레가 세간의 이슈였다.

흉측스럽게 생긴 이 벌레는 국민들을 속여먹기 딱 좋은 대상이었기고 좌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좌파언론들과 단체들은 4대강때문에 강물이 더러워져 큰빗이끼벌레라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지막지한 벌레가 생겨났다고 연일 선동을 해댔고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들은 거기에 부화뇌동하였다.

 

 

 

 

두 초등학생이 수조에 큰빗이끼벌레와 송사리들을 함께 넣어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실험결과 송사리 절반이 죽었다고 한다. 언론들은 위 초등학생의 실험을 기사로 실었고 이 기사를 접한 국민들 상당수는 큰빗이끼벌레가 4대강 공사로 인해 뜬금없이 생겨난 매우 위험하고 해로운 동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초등학생이 무슨 4대강 보에  관심이 있었겠는가... 보나마나 2MB 싫어하는 좌파성향의 부모가 개입한 실험일 확률이 99%다.

 

 

위 실험을 볼 때 감성이 뇌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생태계 파괴하는 4대강', '불쌍한 송사리', '나쁜 이끼벌레'만을 이야기할 것이고 이성이 앞서는 사람들은 '실험의 오류'를 지적할 것이다. 송사리들이 죽은 원인은 50여마리의 송사리들이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용존산소를 덩치 큰 큰빗이끼벌레가 모두 소모하여 죽은 것임에도 광우병 괴담에 선동되었던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저급한 기사나 방송에 현혹된다. 

 

위 실험논리에 의하면 큰빗이끼벌레를 제외하고 송사리 50마리와 민물새우 5마리를 넣어서 민물새우가 죽으면 송사리가 생태계를 위협하는 해로운 동물일 수밖에 없다. 산소발생장치가 없는 수조에서 물에 녹아 있는 산소가 고갈되면 물고기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중학생정도의 과학상식만 있어도 잘못된 실험이라는걸 알 것이다. 언론들도 비과학적인 실험이라는 것을 알지만, 일단은 선동을 해야하기 때문에 아무런 검증이나 팩트체크도 없이 기사를 내보냈다. 더군다나 초등학생이 썩어가는 강을 걱정하는 마음에 했다는 실험이라고 하니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호소력은 몇배로 증폭된다. 광우병 난동때 주부들이 유모차를 끌고 나온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의 언론 수준이 이렇다.

 

 

 

큰빗이끼벌레를 오랜기간 연구해온 해외 전문가나 한국 생물학자의 말에 따르면 큰빗이끼벌레는 1941년부터 전국에서 발견되었고 평소에는 휴면상태로 있다가 생육조건(이상고온)이 조성되면 발아하여 군체로 성장한다고 한다. 흉측한 외모와 냄새를 가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큰빗이끼벌레가 생태계를 위협하는 동물도 아니고 이 동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오염의 척도로 삼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게다가 큰빗이끼벌레는 깨끗한 물에서만 서식한다고 하니, 오히려 강의 수질이 좋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보만 개방하면 모든게 해결되는줄 아는 멍청한 문재인정부는 4대강 보를 개방하라 지시하였고 물이 부족해지자 물고기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면서 녹조는 더 심해졌고, 어용 환경단체들과 좌파들이 이명박때문에 썩어간다고 선동했던 강바닥이 모습을 드러내자 1급수에서만 산다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민물조개가 대량으로 서식중임이 밝혀졌다. 때문에 4대강 이후 수질이 나빠졌다는 주장과 보를 개방하여 강물을 흐르게 하면 녹조가 사라진다는 주장은 거짓이라 할 수 있다.

 

 

 

 

 

1995년 12월 26일자 한겨례신문에 큰빗이끼벌레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1~3급수의 매우 깨끗한 물에서 서식하며, 수질이 오염된 물에서는 금방 죽어버리기 때문에 수질오염으로 인해 생겨난 동물이 아니라는 기사다. 이랬던 한겨례가 2016년에는 4대강 때문에 큰빗이끼벌레가 생겨났다고 하니 국민을 얼마나 개돼지로 봤으면 이런 기사를 내보낼 수가 있는지 참 이해안가는 언론사다.

 

암튼...

좌파들의 큰빗이끼벌레 선동이 여러 생물학자들과 과학적 근거에 의해 반박되자 방송이나 언론에는 더이상 큰빗이끼벌레 기사가 나오지 않았으며, 큰빗이끼벌레로 선동하던 얼치기 환경단체들도 입을 싹 닫았다.

 

국민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고, 정정보도나 정정기사 한줄, 단체들의 사과도 없었다.

 

 

 

 


 

 

4대강은 병신사업이다. 근데 4대강 물좀 쓰게 해줘...

 

4대강은 우리나라 국익을 위한 사업이다.

대통령이 되면 국책사업 한가지씩 하게 되는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새만금 공사를 했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 알다시피 세종시 사업을 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은 매년 발생하는 고질적인 홍수피해와 썩어가는 강을 살리겠다고 4대강 사업을 했다.

 

 

 

 

4대강 사업은 우리나라의 물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의 4대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종합 개발 사업이다.

더불어 매년 발생하는 홍수를 예방하고 일부 썩어가는 강을 회생시키면서 국민들이 강을 찾게 하는 녹색 뉴딜정책이라 할 수 있다. 4계절이 뚜렷하고 장마철도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물이 풍부한 편이지만, 농업, 공업용수 등 물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4대강 사업에는 이 어려운 물관리를 해결하여 농공업 용수를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추가 지류사업을 마련했지만 야당의 극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보다 4대강사업을 등신같은 사업이라며 거세게 비판해오신 안희정 충남지사다.

그런데 2015년 전국에서 충남만 극심한 가뭄으로 제한 급수하는 등 비상사태 돌입하자 정부에 4대강 금강보 물 좀 빌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진다. 누구보다 4대강의 비판했는데 4대강의 물을 빌려야 할 판이니... 안희정 충남지사의 타들어갔던 속마음 이해가 된다.

 

4대강의 물을 끌어다 쓴 덕분에 농민들이 한시름 놓은 것에 대해 이명박 아니, 4대강에 대해 눈곱만큼의 고마움을 느낀다거나, 사업의 타당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을 해보기는 했을까....

 

만약 물자원 관리의 효율화를 위한 추가 지류사업을 야당이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안희정 충남지사는 4대강 물을 끌어다 쓰는 굴욕을 맛보지 않아도 됐었고 충남지역 농민들과 산업단지는 물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런데 그 어떤 언론에서도 야당이 반대하여 각종 용수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는 기사는 단 한개도 없더라.

 

 

 

 


 

 

 

4대강 유역 종합개발

 

4대강하면 이명박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1966년부터 계획, 시행되어온 국가차원의 종합 개발사업이다.

우리나라의 물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의 4대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사업인데 1966년부터 실시된 4대강에 대한 하천 유역 조사를 바탕으로 개발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제1차 국토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국토의 핵심부를 이루는 4대강유역에 대하여 치산과 다목적댐 건설, 하천개수와 관개시설 및 하구언 건설 등 수계의 일관된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로써 해마다 되풀이되는 한수해의 근원을 제거하고 용수의 경제적 공급으로 토지의 고도 이용과 식량의 증산 및 영농의 안정화를 기하며 공업의 지속적인 발전과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한편, 날로 더해 가는 수질오염을 방지하여 보다 살기 좋은 낙토를 건설하는 데 개발의 목적을 두고 있다.

 

출처: 韓國國土開發史硏究(金儀遠, 大學圖書, 1982)四大江流域綜合開發計劃(1971)國土綜合開發計劃(1972)

 

 

 

따지고 보면 이 4대강 정비사업에 대해 역대 대통령들 모두 관심을 가졌으며, 역대 대통령 모두 4대강 정비사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매년 수십~수백명이 홍수로 사망, 실종되고 효율적인 물관리가 안되어 발생하는 경제적인 피해를 그 어떤 나랏님이 외면할 수 있을까...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4대강의 심각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많은 돈을 들여 정비사업을 벌였지만, 4대강을 비난하는 사람들 치고 이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을 욕하고 4대강을 비난하면서도 4대강이 어디어디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답하는 사람 거의 못봤고 4대강이 왜 나쁘냐고 물어봐도 제대로 답하는 사람 못봤다.

 

 

 

 

 

 

 

 

 

그러나 제대로 정비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은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4대강 공사 전의 4대강 모습과 공사 후의 모습을 비교해보자.

공사 전의 4대강은 아주 멀리서 보면 그런대로 괜찮은듯 보이지만, 강어귀나 침식지, 하류에는 온갖 쓰레기가 넘쳐났고 극심한 냄새와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극도로 더러운 사진만 편파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참고로 4대강 공사 이전에는 오염되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면 4대강 공사 이후에는 오염된 곳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차이는 명백하다. 그리고 오염때문에 떠났던 야생동물들이 다시 찾아오는 것만 보더라도 수질 또한 상당히 좋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명박이 싫고 좋고를 떠나서 이정도면 4대강 사업은 할만한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

여기서 다시한번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고 솔직하게 생각해 보자.

 

만약 지금의 4대강이 참여정부시절, 당신이 좋아하는 노무현대통령의 작품이라면?

당신은 여전히 4대강을 비난했을까?

 

 

 

4대강 정비사업은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해오던 사업이었지만, 제대로 성과를 못내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손대서 저정도 결과를 도출했다면 솔직히 칭찬할 만한 사업이 아닌가?

 

 

혹자는 22조원을 복지에 썼어야 했다고 말한다.

일부 네티즌들은 22조원을 김밥 혹은 국방무기로 비교하여 22조원이면 이만큼의 김밥과 무기를 살 수 있다고 선동한다.

그 김밥이면 빈곤층 불쌍한 아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감성팔이는 덤이다.

 

22조원이면 정확히 1년간 보편적 무상복지를 할 수 있는 돈이다.

눈 딱감고 1년간 복지를 해주고 매년 수천억원의 홍수피해와 인명피해, 그리고 냄새나는 쓰레기강을 후대에게 물려줄건가?

 

만약 이명박이 4대강을 하지 않고 그 22조원으로 무상복지를 해서 지지율이 약간 올랐다고 치자.

 

만약 홍수가나서 4대강 주변이 초토화되면 진보진영이 가만있었을까?

이명박이 홍수대책을 세우지 않아서 국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온갖 개지랄을 떨었을거라는데 내 부랄 두쪽을 걸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 22조원으로 무상복지를 할게 아니라 4대강을 정비했어야 했구나..."라고 뒤늦은 후회를 할만큼 이성적이지도 않다.

 

 

 

물론 4대강 공사기간 중 하도급비리나, 로봇물고기같은 병크짓은 욕먹어 마땅하다. 그런 비리는 김대중 새만금때도 있었고 노무현 세종시때도 있었다. 

 

 

 

 

팩트요약

  • 4대강사업은 1966년부터 시작된 국토종합개발 사업의 일부임
  • 4대강 정비사업은 김대중대통령, 노무현대통령, 이명박대통령 세 대통령이 모두 추진했었음
  • 세 대통령중 이명박의 4대강 정비사업이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음 

 

 


 

 

흠이 있어서 싫은게 아니라 싫어서 흠을 만든다

 

그런데 왜 위처럼 더 좋게 만들고 홍수피해도 없애고 정작 4대강 지역 주민들은 좋아라 하는 이명박의 4대강 사업에는 거품을 물고 물어뜯는 사람들이 효과도 못 본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과 비용에 대해선 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일까? 

 

 

 

 

내생각엔...

 

그사람들은 그냥 이명박이 존나 꼴보기 싫은거다.

쥐새끼처럼 생겨서 싫고 3번째 진보대통령이 탄생될 수도 있었는데 이명박이가 끊어 먹어서 싫은거다.

노무현의 실패한 부동산정책이 이명박 당선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진보진영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명박의 굵직한 사업마다 결실을 맺고 있으니, 더더욱 꼴보기 싫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반대했던 한미FTA도 미국보다 우리나라가 더 이득을 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한미FTA를 전면 재협상 한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한미FTA때는 조용히 있다가 바톤을 넘겨받은 이명박대통령이 FTA한다니까 진보성향의 언론 및 단체, 네티즌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광우병이 공기중으로도 전염되며, 생리대를 차도, 라면을 먹어도, 화장품을 발라도 광우병이 전염된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 처럼 아우성이었다.

 

그래서 지금 광우병걸린 사람이 있나?

다들 알다시피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한 이래 단 한명의 광우병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재미있는 사실 하나 소개한다.

 

그렇게 미국소는 광우병소라고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미국에서 미국소를 먹고 광우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2명이 있지만, 모두 해외에서 걸려 온 경우로 밝혀졌다.

 

믿겨지는가?

 

사실 광우병의 온산지는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다.

왜냐면 영국에는 영국소를 먹고 광우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200명이 넘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광우병파동때 선두에 나서서 선동하던 나꼼수 멤버인 주진우기자와 김어준씨다.

맛있게 스테이크를 드시고 계신데, 저기가 어딘고 하니 바로 광우병의 본고장, 영국이다.

 

뭔가 뒤통수를 한대 후려맞은 듯 쌔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우리나라 진보가 항상 이런 식이다.

반미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독려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자식새끼들은 호화스러운 미국 유학을 보내고 남의 귀한 자식들만 거리로 끌고나와 온갖 선동에 이용해먹고 있다. 

 

 

 

 

 

얼마전 뉴스에선 미국소 판매량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보도를 봤다.

한미FTA를 반대하고 광우뻥 선동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미국소고기 절대 안먹었을거라 믿는다. 아니 영원히 쳐먹지 않기를 진심 바란다.

 

이게 우리나라 진보좌파의 이중잣대다.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이라도 잘한 일은 잘했다고 인정하는게 옳지 않을까?

사람이 밉다고 진실을 왜곡, 날조해야만 하는지...

 

증오심에 기반한 비판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흠이 있어서 싫은게 아니라 싫어서 흠을 만드는 대한민국의 뿌리깊은 이념갈등... 통일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념갈등의 깊은 골이 메워지겠지만, 요즘 진보좌파의 이중잣대에 환멸을 느꼈기에 주저리 주저리 두서 없는 글을 써봤다.

 

 

 

 

 

 

P.S

 

블로그 개설한지도 10일밖에 안되었는데 10만명씩이나 방문해서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어떤 분께서 페이스북에 4대강관련 포스팅을 공유해 주셨더라.

 

 

그분의 페이스북 댓글들을 읽다보니 나더러 명박빠라고 하신 분이 계시던데...

 

 

필자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이명박정부때 서훈에 잘못된 점이 있어 바로잡기 위해 보훈처도 여러번 다녀왔고 이명박대통령에게 편지도 여러번 보냈지만 모두 무시당했었다.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행정관과 만날 기회가 생겨서 준비한 관련 자료들을 이명박대통령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난 이명박대통령의 업적은 존중하지만, 국민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인간 이명박은 싫어하는 것이다. 그 댓글을 단 분이 이 글을 볼 가능성은 없겠지만, 혹여 본다면 나더러 명박빠라는 말을 하지 말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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