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3월 31일 만주일보에 공개된 박정희의 혈서.




왜곡 날조된 박정희 대통령의 혈서가지고 진짜로 믿는 병신들이 많아서 팩트검증 해본다.


진보진영에서 혈서 이야기 할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문경 심상소학교 재직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씨의 증언이 나온다.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던 박정희에게 유증선이 충고하길 나이도 한 살 정도 줄이고 편지와 함게 혈서를 쓰도록 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즉석에서 면도칼로 새끼 손가락을 그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바쳤고 만주신문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라고 나오는데 왜 좌파들이 걸핏하면 이 이야기를 꺼내냐면 조갑제가 보수성향의 인물이다보니 자신들의 주장이 더 힘을 받을거라는 계산에서다.


뭐가 틀렸는지 알아보자.



1. 만주군 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이 20세.

2. 나이를 한 살 줄였다.

3. 만주일보가 진짜로 보도했는가?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서가 존재했는가?





쇼와 14년에 작성된 『陸軍預科士官學校生徒、陸軍經理學校予科生徒及陸軍幼年學校生徒召募告示の件』이라는 일제의 공문서다.

 

응시자격 연령 16~20세 미만.

 

유증선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그당시 박정희는 22살이었는데, 한 두 살 낮춘다고 합격할수 있는게 아니라는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증선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시절 교련과목 이수자였다.

즉 그시절 교련과목 이수로 하사관 자격이 있었다.

 

하사관 자격이 있는 자는 위의 제한연령 규정에도 불구하고 26세까지 지원할 수 있었는데, 유증선이 처음부터 저 말을 했다는게 거짓이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나이때문에 만주군을 못들어간다고 고민했다는거부터 개소리. 즉 유증선이 증언하는 그 전재부터 잘못됐다는 말이다.






이게 그 증거자료이며 출처는 역시 앞의 자료와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45년 일제가 작성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를 보면 박정희는 날짜를 고치지 않고 군생활을 한게 나온다.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6년 9월 30일로 되어 있다.

1917년 9월 30일로 되어 있고, 이는 실제 박정희의 생일과 같다.

즉 나이문제로 혈서를 쓰고 고민을 했다는 유증선의 소리가 개소리라는게 나온다.



자 그럼 혈서에 대해서 계속 밝혀보자.

혈서는 1939년 만주일보에 나와있다고 증언했다.





일본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만주일보는 1935년 폐간됐는데, 1939년에 박정희의 혈서를 어떻게 보도하나?

그리고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저 신문에 나와있는 징모과 라는 부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쯤되서 아 거짓이었구나... 하겠지만, 나꼼수 극좌 언론, 극좌논객들의 사설을 보고 단단히 세뇌되어 피보다 진한 신념을 가지게 된 얼간이들을 위해 더 밝혀보도록 하자.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는 신문은 박정희가 1939년 3월 29일에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가 합격한 군관학교는 1939년 2월 24일 합격자 발표를 이미 하였다. 따라서 군관학교에 합격하기 위해서 혈서를 쓰고 채용담당자를 감격시켰다는 기사는 구라로 판명.


좌파들은 합격하고 나서도 합격하게 해달라고 편지를 쓰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혈서의 진본이 남아있다. 라고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데...




이게 좌파들과 쪽바리들이 주장하는 그 신문의 내용이다.

혈서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고 그에 관한 기록도 없으며 다만 위 만주신문의 기사내용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저 신문은 증거로 인증받지 못했다. 


왜냐고?

 

1. 신문 원본이 없음. (즉 신문원본은 없고 저 마이크로필름만 하나 떡히 있다는거다. 원본 요청에 일본측에서 거부)

2. 심지어 저 사진에 있는 신문조차 복사본이다. ( 즉 사본을 저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은것. 사본은 조작이 용이해 증거 효력 X)

3. 저 신문의 다른면은 공개하지 않음. ( 즉 박정희의 혈서가 있는 저 부분만 공개함. 다른부분에 대해서는 박물관  측에서 함구)

4. 저기에 쓰은 글은 1939년 당시 쓰지않는 현대 일본어로 적혀져 있다. (즉 현대에 와서 적은거라는말)

5. 애시당초 날짜가 맞지 않다.

6. 저 자료에 대해 한국측에서 조사를 위해 일본에 공식적으로 요청했지만 박물관측에서 거부.




결론


유증선의 증언과 위 마이크로필름 신문기사 한토막 모두 사실이 아니므로 박정희 혈서는 거짓이다.

저것으로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논리라면 국민들에게 일본 쪽바리 전범(일왕)을 천왕이라 부를 것을 천명하고 일왕 죽었을 때 가장먼저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문했으며, 독도를 우리의 수역 안으로 넣어서 그었던 이승만의 독도라인을 일본과 독도를 함께 공유하게끔 라인을 새로 정한 김대중은 부관참시해야할 친일파가 된다.


이승만이 징집카드의 국적에 일본으로 표기했다고 진보언론들이 물만난 고기마냥 물고 뜯고 맛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뜬금없이 안찬호 선생은 왜 나오냐고?

왜나면 안창호 선생도 출입국 카드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를 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출입국카드 국적란의 일본표기(안창호)



그럼 안창호 선생이 친일파인가?

안창호 선생이 출입국카드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했다고 해서 안창호의 국가정체성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승만의 징집카드 국적란(일본으로 표기함)



위 이미지는 요즘 이슈사 되고 있는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한 이승만의 징집카드다.

반면 당시 90%의 미주 한인들은 korea 또는 corea로 표기했다. 



팩트요약

  • 징집카드의 국적란에 이승만은 일본으로 표기함
  • 도산 안창호 선생도 출입국카드의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함




문제는 진보언론들이 전후맥락 무시하고 물고늘어지면서 이승만의 정체성을 깎아내리려는데에만 혈안이 되있다는건데 다른 팩트들과의 관계에서 보면 해석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하 진보언론들이 말하지 않은 팩트 정리해보자.



안창호는 출입국문서 국적란에 특이하게 한국이라고 적었다가 지우고 일본이라고 썼다. 

아마도 당시의 조선은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안창호 선생은 한국이라 적었다가 아차 싶어 지우고 일본이라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로 안창호는 친일파라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진보언론들의 이승만 징집카드 논리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도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공개한 20여개의 이승만 행정문건 중 일본국적 표기 문건은 단 1건이다. 

나머지는 모두 korea라고 표기했다. 진보언론들은 나머지 자료에는 늘 그래왔듯이 입을 다물고 하나만 물고늘어진다. 그것도 법적 국적취득 여부와 무관하며 개인의 국가정체성을 투사할 이유가 없는 2400만명에게 일괄 배부한 형식적 행정서류 하나만 말이다.


이승만의 국적의식을 보다 잘 반영하는 서류는 아마 외국인등록증이 아닐까?




분명히 국적에 korea라고 적혀있다. 

진보언론이나 좌파진영에서 이승만 국적 표기가지고 물고늘어지는데 왜 제시 자료는 항상 징집카드 저거 하나뿐일까?

그 이유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서다.



이승만은 출입국서류를 비롯한 다른 모든 서류에는 korea로 표기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1918년 하와이에서는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지 수십건의 문건에서 감춰오던 친일의 의지와 신념을 그때 딱 한번 형식적인 행정서류에 진솔하게 표현했다고 가정한다는 건 역사는 커녕 소설로도 안 쳐줄 망상이다. 


역사는 흔히 퍼즐에 비유된다. 


하나의 퍼즐조각(자료)은 다른 모든 퍼즐조각과 아구를 맞춰서 해석해야 한다는 건 역사학의 상식이다. 1918년 10월은 이승만이 미 대통령에게 한국 독립시켜달라고 수차례 편지보내던 그 무렵이다. 그러던 이승만이 의례적인 행정서류 하나 받더니 급진지해져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한 끝에 부들부들 떨며 국적란에 일본이라고 쓰는 상황을 상상하며 그걸 역사적 진실이라고 내놓는 게 진보좌파 편향 역사학의 참담한 수준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상식적인 전제는 


  1. 2400만에게 의례 발송된 행정서류는 그 작성자의 신념을 단정할만한 핵심적인 정보를 주지 않는다.
  2. 징집카드를 어떻게 작성하느냐는 독립운동의 행보나 미국의 외교정책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외교독립운동가 입장에서 거기에 의미를 두거나 특별히 신경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3. 행정서류는 신념표현을 요구하지도, 환경변화나 실천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며, 다만 법적 사실을 요구할 뿐이다. 이상을 고려할 때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이승만은 하와이 행정당국에 괜히 책잡히기 '귀찮아서' 형식적인 서류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법적 사실에 따라 공란을 채웠다는 것이다.

그 뿐이다. 
이 시답잖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부류는 이승만을 현재 정치의 맥락에서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실성한 진보좌파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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