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확장경쟁에 열을 올릴 무렵, 프랑스가 식민지화한 나라중 하나가 바로 베트남이고 대략 100여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 쌀국수의 기원이 프랑스인들이 뜯어먹고 난 돼지 뼈다귀를 가져가 국물을 우려 만들어 먹은게 기원이다.


어쨌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됨으로 1차생산물인 쌀, 고무, 커피, 후추 등의 농작물을 거대 플렌테이션을 통해 수탈을 당하게 됐고, 그 결과 지금도 베트남은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많은 커피원두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어있다. 흔히 알고있듯 남베트남 북베트남으로 갈려 이념에 의한 전쟁을 치룬 베트남이라는 나라는 사실 원래 남-북이 투닥거리던 나라였다.


18세기 중엽 북쪽은 여씨가, 남쪽은 완씨가 세력을 키워 서로 투닥거리다가 프랑스의 원조를 약속받고 완씨가 베트남을 통일하게 되는데 프랑스는 약속과는 달리 별로 한것도 없이 쥐꼬리만한 원조를 빌미로 이것 저것 조약을 맺다가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켜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북베트남인들은 '남쪽 병신들이 외세에 굴복해서 나라를 잃었다'라고 생각하며 이를 갈게 된다.

이것이 훗날 베트남 전쟁의 비엣민(월맹)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근데 1942년에 일본이 대동아공영을 주장하며 연합국 세력을 동남아에서 몰아내게 되는 일이 일어났고,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라 일본군에게 밀려서 베트남 및 인도차이나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에는 새로이 일본군 주둔하게되는데, 일본은 프랑스인들 전부를 쫓아내지는 않고 프랑스 총독부는 그대로 내비두었다.


왜냐하면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긴 했지만 점령지 사정에 밝은것도 아니고 원주민들과 친화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일본말만 잘 듣는다면 그대로 내비두고 베트남에서 자원을 빨아내는게 둘사이에 win-win 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본진이 독일한테 털리면서 베트남까지 컨트롤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베트남의 현지사정에 밝은 프랑스 관리들을 포섭해서 1944년까지 대략 3년간 프랑스 총독부를 부려먹게 된다.




하지만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왕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되자 일본은 베트남에서 철군하였고 베트남 역시 한국처럼 독립을 맞고 독립국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일본군이 주둔했지만 일본은 프랑스인들의 권리행사를 묵인한 상태였고 어찌보면 프랑스 총독부 자체는 베트남에서 그대로 식민지에 대한 권리행사를 계속 해왔던 것. 어쨌든 그런 이유로 프랑스는 일본패망 후 예전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다시 군대를 파병해서 진주하게 된다.


그런데 웬걸?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군들은 상당수 무기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버렸고 더이상 식민지는 안된다며 궐기한 지방의 명문 호족 군벌 세력들이 일본군이 두고간 무기로 이미 무장을 해버렸다. 무장한 지방군벌의 저항에 부딫힌 프랑스는 베트남의 무장해제를 위해 영국과 중국에게 베트남에 군대를 주둔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북위 17도 기준으로 북쪽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17도 이남은 영국의 로열아미가 각각 군대를 주둔을 시키게 되는데,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본토에서 모택동의 인민해방군한테 털리고 있는 와중이라 베트남 정세까지 개입할 여력이 안되었기에 그냥 명목뿐인 군대주둔이었다.





바로 이때 호치민이 나서서 북부지방 호족의 군벌세력을 통합하며 북베트남 정세를 수습하고 공산주의 노선을 표방하게 된다.

즉, 스탈린과 모택동 편에 붙은 것이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엣민, 즉 월맹(Viet Minh/ 越盟)이다.


이렇게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 남베트남으로 갈라지게 된다.

영국도 군대를 주둔시키긴 했는데 버마(현 미얀마)하고 인도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영국은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빼버린다.


어쨌든 북쪽은 이미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거의 장악을 한 상태였고, 프랑스는 이제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장고끝에 악수라고 커져가는 월맹의 압박에 고민하던 프랑스는 월맹의 거점도시였던 항구도시 하이퐁에 포격을 가하고 군대를 투입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2차대전의 전화를 피부로 느껴보지 못했던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패닉에 빠지게 되었고 당장은 체계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월맹군은 하노이를 버리고 산악지대로 숨어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우리나라 1.4후퇴 흥남부두처럼 피난민들이 와글와글 몰려있다.

이게 1949년도 일인데 여기 이후부터는 우리나라도 피곤한 시기라서 별로 관심들이 없을지도...

실제로 미-소-중 간에 가장 큰 관심과 경제/군사력을 집중한 곳은 한반도, 즉 우리나라였으니 말이다.


 

이때부터 벌어진 전쟁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른다.

쭈르륵 건너뛰고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게 된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도 이름을 남긴 전투인데, 디엔비엔푸라는 곳은 대부분이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베트남에서 공중을 이용한 물자조달을 가능하게 하는 프랑스군의 핵심시설이었다. (활주로가 있었다는 말)


철의 요새라고 불리는 디엔비엔푸, 이곳이 없으면 프랑스군은 베트남 내에서 작전자체가 성립이 안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반드시 이 곳을 함락해야만 하는 월맹군. 

프랑스군의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군대조직에 맞서 북베트남이 선택한 전술은 철저한 게릴라 전술이었고 히트 앤드 런으로 대응하는 북베트남 게릴라들에게 프랑스군의 피로도는 말도못하게 심했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 지휘관 나바르는 정글속 게릴라들을 일일이 때려잡다간 세월 다 보내게 생겼고 이 게릴라들을 싸그리 끌어내서 화끈하게 소탕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최고 중요시설이면서도 고립지형인 디엔비엔푸에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월맹이 반드시 디엔비엔푸를 공격해서 탈취해야 하니까 자기네 모든 병력과 물자를 한곳에 몰아넣고 공격해 들어오는 월맹군을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림으로 보면 이렇게 방어만 하면서 몰려드는 월맹군을 조진다는 개념이다.

프랑스 지휘관 나바르 장군은 당연히 이길거라는 생각에 빠져있어서 그 이외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를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프랑스군 최정예 부대 15,000명이 요새에 배치되고 월맹 게릴라들과의 일전을 준비를 한다.


 

근데 한가지 간과한게 날씨의 중요성.

베트남은 위아래로 긴 형태의 나라고 디엔비엔푸 지역은 열대 몬순기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10월에서 이듬해 3월은 날씨가 좋은데 4월부터 9월까지 1,5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는 기후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바르는 벙커로 입구를 틀어막고 수송기로 탄약 및 식량, 의약품 등을 투하하면 되겠지~하고 보급에 대해 낙관적이었지만 현실은 보급을 할 수가 없었다. 악천후야 그렇다치고 어찌어찌 디옌비옌푸까지 날아가더라도 디옌비옌푸를 둘러싼 월맹군의 대공포때문에 화물투하도 제대로 안되고 투하거리까지의 접근이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싣고왔으니 투하하면 그중에 몇개는 진지에 떨어지겠지 하고 대충 뿌렸는데 대부분 월맹군이 줏어갔다.

1954년 3월, 월맹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이게 웬걸? 막상 뚜껑열어보니 월맹군이 의외로 강했던 것이다.

그냥 그 전처럼 원주민이 소총정도로 무장한 줄 알았는데 정규군급 무장과 전술로 개전 수시간만에 프랑스군 진지 하나를 초토화 시켜버리자, 프랑스군은 당황하여 전투기를 출동시켰는데 정글속에서 뿜어대는 월맹군 대공포에 작살이 나버린다.


이는 어디선가 군사적 지원을 받은게 분명하다는 이야기.


※ 나중에 기밀해제되면서 미국의 CIA가 1946년까지 월맹을 지원했다는게 밝혀짐.

 


더 웃긴건 프랑스가 월맹군을 얼마나 빙다리 핫바지로 봤는지 월맹군 포격을 아예 고려도 안했다는 것이다.

월맹군은 반대편 고지에 포를 끌고와서 프랑스 진지를 포격으로 두들겼고 프랑스가 대응포격을 해보려고 했지만 디엔비엔푸가 상대적으로 저지형이라 포격이 불가능했다. 위에서는 계속 월맹군 포대좀 어케해보라고 다그쳤지만 방법은 없고... 결국 멘붕한 포병대장은 권총자살하고 만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4월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폭우시즌이 시작됐다.

이 말이 뭐냐면 그나마 뜨문뜨문 오던 보급마저도 아예 끊어지게 된 것이다.

암만 세계최강의 군대라도 보급이 없으면 싸울 수 없는 법...


배고프고 목도 마르고... 폭우가 쏟아진다지만 정작 마실물이 없다는게 함정이었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같이 시작된  장티푸스, 이질로 인해 물은 사방에 널려 있었지만, 음용수가 없었던 것.

거기에 우기가 시작되면서 창궐한 모기떼들 때문에 발병하기 시작한 말라리아는 덤이었다.




마침내 5월 7일 8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스군은 견디다 못해 결국 항복 하고 만다.


다음날인 1954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회의 내용은 프랑스는 약한 베트남에게 얻어 터졌으므로 베트남을 점령할 자격이 박탈되게 된다는 평화합의성명이었다.

대부분 나라들은 베트남 독립에 동의했지만 2차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새로운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미국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읭?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이 어째서 베트남의 독립을 반대했지?

내 블로그에 와서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박박 우기던 좌빨 꼰대아재의 논리가 바로 위 사실을 근거로 한다.


여기에는 미국이 반대입장을 낼 수밖에 없는 몇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1950~1953까지 막대한 군병력과 물자, 비용을 퍼부은 한국전쟁이 명분에서나 실질에서나 별로 소득도 없이 끝났다.

(당시 분위기는 그랬고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한국은 100년동안 깡통차고 다닐거라는 생각이 당연시 되었으니까 말이다.)



둘째

에치슨 라인을 확보하여 태평양호수(Pacific Lake)를 만들어 제해권을 확보하려면 베트남이 공산화가 되면 절대로 안됐다.

여기서 잠시... 에치슨 라인이 뭐냐면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1950년 1월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모택동 두 돼지의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설정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이었다.





미국의 지역방위선은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라인 즉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거였는데 여기엔 한국하고 대만, 인도차이나반도가 미국의 방위에서 없었다. 그리고 바로 5개월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딘 애치슨은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재설정된 에치슨라인이 소위 말하는 독도를 기점으로 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이승만 라인이었는데, 훗날 김대중대통령에 의해 일본에게 유리하게 변경되었다.



아마 베트남이 공산화 안됐더라면 필리핀의 수빅 미군기지는 없었을거고 미군의 동북아시아 물류허브를 베트남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아시아 판도는 많이 달랐을거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는거지만 그때 당시에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어쩌면 대한민국이 베트남, 라오스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셋째

이게 중요한건데 사실은 프랑스와 베트콩의 전쟁은 대리전이었다.

미국이 직접 개입하기 좀 뭐하니까 예전에 연고가 있던 프랑스를 불러서 전쟁비용의 90%와 무기, 탄약을 줘가면서 싸우라고 독려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프랑스가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보급이 바닥나서 항복을 하니 미국으로선 열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열받은 미국은 독립국가 인정을 하지 않았고 북베트남보고 꼬우면 나랑 한판 뜨자고 하여 회담장 분위기가 급냉각된다.



넷째

미국이 베트콩의 성분을 잘못 파악했다는 데에 있다.

사실 1946년 까지는 미국이 물자도 나눠주고 유럽국가들의 식민지팽창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지원해준건데 호치민이 알고보니 공산주위자 였던 것.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에 사로잡혀서 살짝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공산주의의 "공"자만 나와도 분노하던 미국 국민들은 15년간 알고지낸 옆집 스미스 아저씨도 신고때리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이사람이 존.R.매카시



위스콘신주의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이사람이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내가 그 명단을 갖고 있다." 이런 말을 날려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근데 당시에 메카시한테 "야 너 그말 책임질수 있음? 팩트있음?"하고 몰아부쳤는데 매카시는 "증거는 있는데 일반에 공개하면 사회적 파장이 있으니까 비공개로 입증하겠다" 라고 해서 비난을 받게 된다.


결국 매카시가 몸담던 공화당에서조차 매카시를 비난하는 결의를 내고 정치생명이 끝나지만, 2003년 기밀해제되면서 매카시 주장이 사실이었다는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때 미국이 엄청난 혼란도 겪고 억울한 사람도 많이 나왔지만 내부 청소를 깨끗하게 단행하고 앞으로 나아갈 정책기조가 만들어지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매카시즘이 지금은 안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그와 무관하게 그 당시에는 미국엔 심각할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이 들끓었고 심지어 초대 FBI 국장 에드가 후버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정도였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이다"

                      

당시 미국은 여기저기서 빨간 선동하는 길거리 선동꾼들도 실제로 많았고 Communist Party USA라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실제 빨갱이 정당이 활개치던 시기였다. (60여년 전의 낡은 사상을 한국에선 지금까지 추종하는 세력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뿐) 암튼 이 이야기는 일단 베트남 전쟁의 배경을 이야기하자면 뺄수가 없는 부분이다. 정확히는 Progressive Party(진보당)이지만, 원래 출범할 당시는 미국 공산당이었다. 근데 세상 분위기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분위기다보니 슬쩍 이름을 모호하게 바꾼 것...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정당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해산되었다.





그리고 1947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비에트 연방하고 완전히 선을 긋는 발언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자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것이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다.

이 후,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과 방향타가 되는 정책이 되었고 수십년간 지구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됐다.

두 진영이 경쟁하면서 군사/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다시 베트남 상황으로 돌아가서...


어쨋든 링위에 올라간 놈은 프랑스였고 1954년 7월 20일 제네바에서 프랑스하고 호찌민 정부하고 협상을 한다.

그리고 그 협상에서 "2년뒤인 1956년 6월까지 남 북 총선거해서 단일 베트남 정부 수립하고 우리는 그거보고 철수할께"하는 합의를 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병신짓... 이것이 바로 김일성부터 시작해 김정일, 김정은, 한국에서는 현 문재인대통령이 추진하려 하는 연방제통일과 같다.


미국은 이제 프랑스가 싸놓은 똥을 치워야 할 상황이 됐다.


잘 보면 프랑스 vs 베트남의 전쟁은 제국주의 vs 민족주의 양상이었는데, 2년뒤 베트남 총선거가 열린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당연히 호치민의 압승으로 끝나는거였고 이건 볼 것고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남한과 북한이 연방제통일 총선거를 했을 때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북한은 100% 투표율이 나올 것이고, 친북성향의 대가리 빈 개돼지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100%가 나올리 만무하다.

그래서 연방제통일을 하면 북한주도의 공산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대한민국 개돼지들은 우리이니가 하는건 무조건 옳다고 박수를 쳐주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


이야기가 딴데로 샜다.


암튼...

그렇게 되면 베트남은 당연히 공산화가 되는거고 그런 결과가 되면 도미노 효과로 인해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의 팽창은 불보듯 뻔한 것.



그래서 미국은 아직 덜 빨간 남베트남에 친미 반공정부를 수립해서 적화를 막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트남은 그때까지 유명무실한 황제가 있긴 있었는데, 바로 응오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였다. 사실 예전에 망했어야 하지만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위해 얼굴마담으로 세워둔 인물. 베트남인들에게 식민지배라면 이가 갈리는데 식민시대 로봇황제로 새정부 세우면 반감만 커지는건 당연한 일.


그냥 새정부를 안세우고말지...





그래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이라는 철저한 반공주의자 인물이 낙점이 된다.


그리고1955년 10월 26일 공산주의와 타협은 없다! 남북선거 무효를 외치며 남쪽의 단독선거로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베트남의 분단체제가 확립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런 남북분단으로 오히려 곤란한 상황에 빠진건 호치민이었다.

오랜 전쟁은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북베트남은 아직 정치체제나 사회질서도 확립되지 않았고 도와준다던 스탈린 모택동 두 돼지들은 연락도 안되었다. 오히려 미국+남베트남 연합의 병력들이 밀어붙이면 언제라도 백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제 남베트남에 지엠 친미정부를 세우고 베트남은 자유민주주의국가임을 선포하고 지지해준다. 디엔비엔푸 전투까지는 식민정책을 앞세운 열강의 패권주의 vs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의 양상이었지만, 이제 미국의 개입한 이 후 공산권의 지원을 받는 공산세력 vs 서구 자유주의의 지원을 받는 자유세력의 대결 양상이 된 것.


응오딘지엠 정부는 초기에는 정치를 어느정도 잘 하는 듯 보였고 지엠정부의 정치기본노선은 반공, 보수였다.

"때려잡자 호치민! 무찌르자 공산당!" 이 기본 슬로건이었단 말.

그러니 미국입장에서는 뭐 "음 잘하고있는 모양이군" 이정도로만 생각하게 된다.

 

애초에 호치민이 제안한 1956년 남북총선도 거부하고 독자적인 남베트남 정부를 수립한 것도 "공산주의자들하고는 협상같은거 없어!" 이런 강직(?)한 반공정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데 항상 모든 역사가 그렇듯 문제는 전혀 생각치 못한데서 발생한다.


그 시작은 응오딘지엠의 주변권력자들의 부패와 부정였는데,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지엠 대통령이 독재하고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건 진짜 원인은 아니다. 남베트남 사회가 미국이 생각하는 것만큼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엔 국민의식이 너무 낮았다고 얘기하는게 아마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일단 독재라고 불릴만큼 긴 시간을 통치한것도 아니고, 일단 모양새 자체는 정식 의회를 가진 합법정부 아래서 남베트남 정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응오딘지엠도 문제였지만, 응오딘지엠과 함께 가야할 지방 호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다른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동남아권 국가들은 아직도 지방호족이 득세하는게 현실이다.


일례로 2009년 민다나오의 마긴다나오주(州)에서 선거기간에 시장 후보와 기자단을 싹쓸이해서 처형한 근대사에 유래없는 일이 있었다. 그게 그동네 호족 명문가인 안달 암파투안이 대대로 해처먹고있었는데 "민주선거가 좋은것이다!" 하면서 자기 밑에 일하던 놈이 출마하려고 하니까 자기 사병(私兵)들 시켜서 기자단하고 시찰중이던 시장후보를 모조리 암살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전세계적인 여론이 크게 들끓었지만 아로요 가문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지지호족세력이라 나중에 유야무야 끝이 나버린다.


※ 필리핀은 아로요 VS 아키노 가문이 대통령을 서로 배출하는 혈통세력



각설하고....

 

독재는 호치민 패거리가 갖다붙인 말이고(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군중들은 자세한거 싫어한다. MB OUT도 그래서 나온 것) 디엠이 실정(失政)을 하게 된 이유에 디엠본인이 문제인 이유도 있지만, 이 지방호족들이 크게 관련되어 있는데, 남베트남의 호족세력들은 그전에는 누리보지 못한 경제적 풍요와 막강한 권력이 한순간에 쥐게 되었다.


누구때문에?


미국때문에...


그냥 공산주의 OUT! 만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해준거다.

어쨌든 사회의 부의 편중과 부정부패는 확산되어갔고 이로 인해 사회불만세력이 나타나게 됨과 동시에 얘네들을 살살 긁는 선동꾼들(우리나라로 치면 종북단체 및 기타 세력들)이 나타났는데, 이렇게해서 남베트남에서는 월맹의 지원을 받는 산하 단체들이 지들끼리 국가에 준하는 행정체제를 구축해버린다. 그중 가장 큰게 종교단체였는데 이는 불교와 천주교 양쪽에 큰 세력으로 자리잡아 민중들의 선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자신들이 추종하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숙청됨)




나중에 남베트남 멸망하고 사이공시를 호치민시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얘네들이 자경단 비스무리한 조직을 만들게 되고 이게 시민군으로 발전해서 정부에 폭력으로 대항하다가, 2차 전쟁 개전 후에는 베트콩에 전부 편입되어버린다. 결국 1960년 12월 20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지엠 반대세력들이 민족해방전선 (NLF : Nation Liberation Front)을 결성한다.



둘째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건 응오딘지엠의 제수씨였던 마담 누 였다.





인터넷에서 많이 본 사진이다.

틱광둑이라는 승려가 소신공양을 하는 순간인데, 이 한사람의 분신자살이 이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될지는 아마 당시엔 누구도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일단 지엠대통령은 카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지엠의 가장 최측근은  제수씨였던 마담 누였다.(위 사진)


원래 이름은 트랑 르 수안인데 지엠 대통령 동생인 응오딘누의 와이프였다.

응오딘지엠은 정부 요직의 관료를 가족들로 채웠는데, 동생 응오딘누는 내무장관, 마담누의 아빠는 미국 대사, 엄마는 유엔대표, 마담누의 삼촌들은 각료로 임명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미혼이라 마담누는 영부인의 자격으로 대통령궁에서 살게했다. 그런데, 이 응오딘디엠과 마담 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디엠이 마담 누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나게 된다.


알고보니 이 마담누의 실체는 골이 텅 빈 된장녀였던 것.

비싼돈 처들여서 파티하고 놀아제끼는건 일상이고 여성부 비스무리한걸 만들어서 이상한 법을 제정, 이혼, 간통, 피임, 음주, 춤, 무당, 노름은 다 불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마담 누도 카톨릭 신자였는데, 위에 얘기한 틱광둑 스님이 분신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마담누에서 비롯된다.



1963년...

 

호구남 지엠은 마담 누하고 뭔 얘기를 나눴는지 베트남 내의 불교사찰을 폐지한다는 이상한 법을 의회 통과시켰고 그리고 같은해 5월 석가탄신일에 불교 행사를 다 금지시켜버리게 된다.





"이제부터 절금지! 스님금지!" 


당연히 불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지금도 베트남 국민 75%가 불교신잔데, 정말 후안무치한 법이 아닐 수 없었으며 당연히 여기저기서 시위가 일어났고 지엠정부는 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을 해버리는 바람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종교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1963년 6월 11일 틱광둑이라는 승려가 목숨을 불사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어쩌면 그냥 극렬분자의 분신자살정도로 끝날 일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의 물꼬를 터준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마담 누였다. 이미 그전부터 된장녀 짓을 하도 하고 다녀서 콜린스 미국 대사가 마담누를 정치에서 좀 물러나게 하라고 지엠 대통령한테 몇번 얘기를 할 정도였다.


마담 누는 이 틱광둑 분신사건에 대해서 정말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리는데...

 

"어머 라이브로 바베큐 되는 중 또 나타나면 이번엔 나 꼭가서 구경해야지!" 라는 어이없는 메가톤급 발언을 했고






아니나다를까 틱광둑 이후로 6명의 분신자가 더 나타났고 종교탄압에 대한 시위+소요사태를 이용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분탕질로 남베트남 사회는 엉망이되어갔는데, 한국으로 치면 2008년 광우병 폭동때 종북단체들이 개입해서 선동질하며 폭력시위로 변질시킨 것과 100% 똑같다. 


놀팅 대사는 마담누좀 빨리 어떻게 좀 하라고 닥달했지만, 지엠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할 시기는 한참전에 지났다.

단순히 제수씨였다면 어떻게 정리를 했겠지만, 그렇게 못했다.

1963년 8월...드디어 이성을 잃은 지엠은 계엄을 선포하고 절에 군부대를 투입해서 1,400여명의 승려를 사찰폐지법(?) 위반으로 체포하게 된다. 그리고 절에 군대가 투입되어 승려들을 사살하고 곤봉으로 뚜들겨 패는 모습을 마담 누에게 보여주면서 마담 누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고 마담 누는 자신에게 충실한 지엠의 행동에 기뻐하였다.





이 미친년은 그날 저녁 언론 인터뷰에서 "이 때가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라고 끝없는 망언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남베트남은 이미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고 결국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나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 종교탄압에 대한 불만을 그냥 놓칠 호치민이 아니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감을 직감한 미국은 같은해 8월 지엠을 지지했던 놀팅 대사를 소환하고 헨리 캐봇 로지 대사를 급파했다.

로지는 시급히 남베트남의 상황을 파악한뒤 워싱턴에 1급기밀문서를 타전하게 되는데, 내용은 지엠정부는 이미 절망적 상태이며 대다수의 남베트남 국민들이 호치민 세력(북베트남 간첩, 좌익세력 등)에 의해 선동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1963년 11월 1일 남베트남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된다. 




응오딘지엠 대통령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 는 쿠데타를 일으킨 두옹반민 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근데 재미있는건 그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 마담누는 미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남편(?)이 사망한 걸 알고는 이탈리아로 망명해버리고 만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일부 학자들은 호치민이 미인계를 쓴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


결국 엎어진 물은 어쩔수 없어서 미국은 쿠데타 세력에 대해 실낱같은 기대를 가졌다.

쿠테타 세력이 독재권을 뒤엎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길 기대했던 것...


근데 이 쿠테타 세력들이 NLF(남베트남해방전선, 우리나라로 치면 통진당같은 종북세력)에 우호적인 것이 아닌가...


"북베트남 님들... 미국놈들 제껴버리고 우리민족끼리 대화합시다!"


결국 미국은 믿을놈 하나도 없구나 하고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즉각 본격개입을 시작해서 1962년 남베트남 군사원조 사령부 (MAC-V : 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를 설치하고 준 전시상태에 돌입한다.

직접 나서서 한판 떠야 결말이 나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 그렇게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남 북의 대립과 긴장은 높아져가다가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게된다. 



[아래부터는 엔하위키 참조]


1964.8.2. 

통킹만 공해상에서 정찰임무(코드명 DESOTO Patrols; 북베트남의 해안레이더를 가동시켜 레이더망을 파악하려던 작전)중이던 미 구축함 매덕스(Maddox)호를 향해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했으나, 매덕스호는 어뢰공격은 피하고 기관총 공격에 의한 아주 경미한 손상을 입었음


1964.8.3. 

미 국무성은 북베트남에 강력히 항의하며 더 이상 도발할 경우 중대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


1964.8.4. 

터너 조이(C. Turner Joy)호와 함께 다시 정찰임무에 나선 매독스호는 북베트남으로부터 공격의 전조로 추정되는 레이더 시그널을 받고 있었고,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소나 담당병사가 자신의 배의 프로펠러 소리를 북베트남의 어뢰공격으로 착각하여 어뢰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함. 나중에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그날 밤 북베트남의 공격이 실제론 없었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 당시 미군 당국과 함정의 승무원들은 공격이 있었다고 확신함.







즉, 미국이 전쟁을 촉발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격받았다!' 이라고 허위보고 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미 의회는 베트남 전쟁을 승인하고 1965.8.5. 미 항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호와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호에서 함재기들이 발진하여 북베트남의 어뢰정 기지를 폭격하였다.


이렇게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이고 미국의 국익을 위했던 어쨌건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지, 아무 이유없이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은 당시 매우 복잡다양했던 남베트남의 정세와 국제 이해관계도 모르면서 극좌언론의 사설들만 주워 듣고는 월남전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부득부득 우기는 극좌 꼰대아저씨 공부좀 하시라고 포스팅 함.





1954년 7월 21일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월남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권인 월맹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60년 12월 공산 월맹의 지원으로 월남 내 공산조직인 월남민족 자유전선이 설립되어 월남 정부에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본격적인 월남전이 시작되었다. 신생독립국 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미국은 1964년 이후 연간 500억 달러를 퍼부으며 53만 여명을 파견, 전사자 5만 8256명 부상자 20만명이라는 피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악화된 여론 및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발을 빼기 위해 1968년 5월 10일 파리에서 월맹과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한다.





당시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100만톤의 식량을 비롯한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대남적화 공세를 멈추지 않았던 월맹이 평화협상에 나선 목적은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 봉기를 통해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세우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측에서 평화협상을 제의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결국은 미국을내쫓기 위해서 한 거였거든요. 미국을 내쫓으면 공산화 시킬수 있다. 평화회담을 하기전에도, 할때에도 , 한 다음에도 무력남침 공산화 전략은 변함이 없었거든요. 겉으론 변한것 같아서 거기에 속았죠. 그래서 월남은 망한 거죠."

 

 

월남의 정치 상황은 이러한 월맹의 치밀함과는 대조적이었는데, 전쟁이 치열했던 1967년 9월3일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난립했다. 이 선거에서 패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 변호사는 외세 배척및 우리민족 끼리를 내세우며 동족 살상,월맹에 대한 폭격금지, 미군철수, 조속한 남북 평화회담등을 주장했고 이같은 발언은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여론을 자극했다. 마치 지금의 대한민국내 종북세력들 처럼...





 

"우리끼리 싸움을 해서 말이야 더군다나 외국군까지 불러들여서 여기가 피바다가 되었으니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안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평화 협정을 맺어서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해 나가겠다. 우리는 한민족이다. 이렇게 자꾸 주장을 하는데 공산당 당원이었던 거야. 몰랐죠."





파리에서의 비밀협상 진행이 알려진 후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5년여 협상끝에 월맹에 40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등 12개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월맹이 심리전, 월맹내 사회불안,미국내 반전 분위기등에 시달리던 미군은 월남 야당의 철군주장을 빌미로 1973년 3월 전면 철수하게 된다.


 

미군 철수의 결정적 원인은 택토 공세때문이라고 할수있다.

택토 (월남의 구정 연휴) 공세란 월맹의 기습공세로 미대사관이 점령당하는 등 위리를 맞았으나 미군의 반격으로 9만명이상의 월맹군이 사살됨





"미국이 발을 뺀 근본적인 원인은요. 미국 대사관이 점령을 당하니까 말이야 앞으로 아무리 싸워도 끝이 안나겠구나.그들이 미국을 내쫓기 위해서한거죠. 월맹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었는데도 그건 전부 외면하고 신문에서는 미 대사관이 점령당했다. 미군이 몰살당했다 하니까 정말 이쪽이 사실은 크게 이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배하고있는 것으로 인식 되어 버렸습니다. 다 이긴 전쟁이었는데.다평정하고 월맹군이 산악지역에 조금 남아있었는데 월남 통일을 못하고 미군이 나가버렸죠."



13만 군사중 9만명 이상을 잃은채 미군의 공격을 피해 산악 지역으로 피했던 월맹군.

하지만 미군은 월맹군을 완전 섬멸하지 못한채 반전 여론에 의해 철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장비도 훨씬 우월한 적을 대면해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면이든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려 했죠.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전선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철수 당시 미국은 월남과 방위 조약을 체결하면서 월맹이 평화협정을 파기하면 해군및 공군력을 동원하여 월맹에 대한 폭격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굳게 약속했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와 장갑차 400대 항공기 700대등 10억 달러 이상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함으로써 그무렵 월남의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의 남북의 경제력 차이와 미군의 철저한 유사시 지원 약속은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 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미국은 그럴 것이라 판단했다.





"(평화협정 채결 후) 티우 대통령을 만났어요. 월맹이 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죠. 월맹은 전쟁할 능력이 없다. 너무 가난해서 하루 두끼도 못먹는다. 그것도 소금 바찬으로 연명하고있다. 미국이 4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협정을 깰수 있겠는가?10년 동안은 못 나온다. 그 기간동안 석유개발등을 통해 월맹과 격차를 벌여 놓으면, 월맹은 끝내 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월남에서는 파리에서 채결된 평화협정을 완전히 믿고 있었죠. 협정을 통해 모든게 해결될것이라고.."




이같은 믿음은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이 월맹을 과소평가하고 총체적 안보불감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부, 승려, 언론인, 학생등 좌익 인사들은 이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티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또 월남 정부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만에 반정부 게릴라 단체인 베트남 임시혁명 정부청사에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까지 많은 공산 간첩이 침투해 있었다.


1967년 대선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를 비롯해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와 대통령 비서실장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경찰장관이었던 창반만, 대통령궁을 폭격한 월남 공군 대위 구엔타인충등 많은 정치인과 관료, 군인 언론인, 종교인들이 공산간첩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수있다.





그리고 이러한 월맹의 치밀한 정보수집과는 대조적으로 월남의 대공 정보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못했다.





"우리는 제복을 입은 운전사가 모는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타고 부유한 자본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드러내놓고 왕래하며 상황을 염탐했습니다. 혹시라도 계획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이었죠."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면 정보기관들이 또 바뀌고 이러다 보니 정보기관들이 완전히 무력화 되어 이북(월맹)의 정보가 많은데 하나도 알아내지 못한 거죠."





공산세력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수십개의 언론사를 통해 정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우익인사들을'무식한 전쟁광'으로 매도하는 한편 무자비하게 암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 중산층,언론인등 다수의 우익들은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결국 소수의 조직화된 좌익들의 공세에 당할수 밖에 없었다.

 

1975년 3월 10일 월맹은 파리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월남에 이미 오래전부터 침입해 있던 간첩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는 동시에 18개 사단이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즉각 전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해서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는 티우 대통령의 호소를 외면하고 짜후탄 신부와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를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분열과 총체적 부패 그리고 의욕상실에 빠져있던 월남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 겠다는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1975.3.26  월남의 제 2도시 '다낭' 함락

1975.4.21  티우 대통령 하야. 해외 도피

1975.4.30 월맹의 총공세 50여 일만에 사이공 함락

1975.4.30 자유월남 패망



군사, 경제력 및 인구등 모든 면에서 월맹을 압도했던 자유 월남은 결국 월맹의 총공세 이후 50여일만인 4월30일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이공 함락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은 물론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며 월남 패망에 앞장 섰던 짠후탄 신부 등 종교인, 교수, 학생 및 통일 운동가 까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어 졌고 대부분 처형되는 등 수백만 명이 처형, 학살되었다.


 


"베트콩으로 활동한 월남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해 제거해 버렸습니다."

리 라닝 ('베트콩과 월맹의 내막'의 저자)





이렇게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인사들까지 처형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런일이 뜻밖이라고 생각하냐구요? 강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정도의 일에 그리 놀라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지킬줄 몰랐고, 진실을 알면서 침묵하기만 했고, 외면하기만 했기에 자유의땅 사이공은 함락이후 너무나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결국,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는 월남 국민들에게 평화 협정과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 조각일 뿐인 것...

 

공산화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이어진 보트피플들의 월남 탈출.

약 106만명으로 추정되는 보트 피플중 11만명이 배가 전복되어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것으로 추정되고있다.




당시 공산 월맹이 구사한 전술

 


'통일 전선전술'

 

 

약 6000여명의 정예 공산당원들을 월남에 침투시킴

민족을 내세워 월남의 종교인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등을 배후 조종, 반정부. 반미 시위를 주도(남한의 종북세력과 똑같다)

결국 월남은 내부분열.

미군철수.

주적계념, 경계심 무너짐.

 월맹의 공격.

(월남의 전투기조종사는 자기가 지켜야할 대통령궁으로 기수를돌려 맹렬한 폭격을 가함.

↓  

월남은 이미 전의 상실.

자유월남은 1975년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짐



왠 극좌 아재가 월남전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댓글을 달길래 포스팅하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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